그날이 왔다. 드디어 해방의 그날은 왔다. 1945년 8월15일 정오,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인다는 조서가 일왕의 목소리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언뜻 들어서는 일본인도 이해하기 어려운 한문체 문장이었지만, 일본이 패배했다는 소식은 전 조선에 급하게 퍼져나갔다. 전쟁에서 진 일본에 8월15일은 ‘가장 긴 하루’였지만, 조선인에게는 고통의 식민지배가 끝나고 해방의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는 것을 알리는 빛나는 하루였다. 이제는 매일매일의 공출이 없어지고, 징용과 정신대 같은 죽음의 행렬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일본과 만주, 중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부모 형제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분할 점령’과 시작된 해방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함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은 역사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우리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이 움텄다. 이 새로운 시작이 어떻게 귀결될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제국주의가 지배하던 식민지에서 벗어나 한민족의 힘으로 나라를 수립해 국제관계에 당당한 일원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1945년 8월의 ‘해방’은 홀로 온 것이 아니었다. 중국에서 해방 소식을 들은 김구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해방이 우리 손으로 이뤄지기보다 연합군의 승전으로 결정됐기에 강대국의 힘이 큰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김구의 말은 곧바로 현실에서 나타났다.
한반도에서 ‘해방’은 승전국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 점령’과 함께 시작됐다. 만주에 들어온 소련군은 관동군을 격퇴하고 8월 초 북한 지역에 진출했다. 이에 비해, 기나긴 남태평양 지역 전투로 일본 오키나와에 간신히 들어갔을 뿐인 미군은 소련의 빠른 남진을 걱정했다. 미국은 한반도를 가르는 38선을 경계로 하는 관할권역 분담을 소련에 갑자기 제안했다. 동유럽, 쿠릴열도, 사할린에 관심을 두던 소련은 미국과의 협력관계를 고려해 이의 제기 없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미국을 놀라게 했다.
결국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소련 관할권과 미국 관할권으로 나뉘었다. 38선을 통한 영토 분할의 전제 조건이 점령이었다는 점에서, 군사력을 동원한 점령은 제2차 세계대전 뒤 세계 판도를 그려나가는 절대적 수단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군사점령은 독일·일본 등 연합국에 맞섰던 적대국가의 점령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였던 국가를 점령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현상이었다. 단 며칠 사이에 한국 현대사의 구조와 방향이 결정된 것처럼 보였지만, 이는 전후 세계 판도를 획정하는 밑그림이었다.
우리는 보통 9월2일 도쿄만의 미주리호에서 체결된 연합군과 일본군 간 항복 문서 조인식만 알고 있지만, 미군은 전투를 치른 대부분의 지역에서 항복 문서 조인식을 했다. 8월에는 버마 랑군과 마셜제도에서 항복을 받았고, 9월2일 일본 본토와 남양군도 팔라우, 사이판 지역에서 동시에 항복을 받았다. 다음날 필리핀에 이어 웨이크섬, 오키나와, 뉴브리튼섬을 거쳐 12월까지 대만, 베트남, 오가사와라제도에서 각각 별도의 항복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유례없는 과시였다. 서울에서는 9월9일 38선 이남 지역에 대한 공식적인 항복문서 조인식이 있었다.
조선총독부에서 항복 문서 조인식1945년 9월8일 인천에 상륙한 미군은 다음날 서울역에 내려 조선총독부(중앙청)로 향했다. 미 제24군단 하지 장군과 미국 제7함대 사령관인 토머스 킨케이드 해군 중장이 미국 대표단을 이끌었다. 육해군의 경쟁심으로 양쪽이 같이 조인식에 참가한 것이다. 대표단은 항복식을 위해 차를 탄 채 도시의 주요 거리를 지났고, 미군은 열을 맞춰 행진했다. 수천 명의 조선인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미군을 반겼다. 질서 유지에 동원된 일본의 기마경찰은 열광적인 군중을 진정시키며 간신히 미군과 거리를 유지하기에 바빴다.
항복식은 오후 4시8분에 시작됐다. 일본 대표단이 첫 번째로 방에 들어왔다. 일본 대표단은 아베 노부유키 총독, 제17방면군의 사령관이며 조선 내 최고 군 지휘권자인 고즈키 요시오 장군, 야마구치 기사부로 해군 중장이었다. 이들은 오직 북위 38선 이남의 군대만을 대표했다. 북조선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은 별도의 항복 절차를 밟지 않았다. 일본 대표단은 모두 제복을 입었지만, 칼을 차거나 훈장을 달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들어왔을 때 누구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미국 대표단이 들어왔을 때는 모든 참석자가 일어나 차렷 자세를 했다.
항복 문서 두 장은 영어로, 한 장은 일본어로 돼 있었다. 일본 대표단은 꼼꼼하게 항복 문서를 읽지 않은 채, 석 장의 문서에 각각 서명했다. 서명에 10분이 걸렸다. 하지 장군은 방금 조인된 항복이 일본의 비무장화와 전세계의 평화 달성을 향한 또 다른 한 걸음이 됐다고 선언했다. 미군 대표가 방을 떠나자, 일본인들이 따라갔다. 당시를 촬영한 동영상을 보면, 아베 총독은 비틀거리며 한동안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베 총독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조인식 서명이 끝난 뒤, 미군은 일본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올리는 의식을 조선총독부 건물 앞에서 거행했다. 일본군의 패배와 미군의 승리를 만천하에 보여주는 숭고한 의식이었다. 성조기가 올라가자 제7사단 군악대가 미국 국가를 연주했다. 의식이 끝난 뒤 미군은 총독부 건물에서 앞장서서 대로를 따라 행진했다. 에는 “많은 조선인들은 성조기가 올라가는 동안 담 위에서 바라보고 있었고, 열광으로 거의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쓰여 있다. 조선 사람들은 미군과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고, 해방자적 존재로서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성조기가 올라갈 때 조선인이 환호했던 것은 성조기가 태극기를 대신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지만, 성조기는 성조기일 뿐이었다.
38선 남쪽에서 항복문서 조인식은 한 번만 열린 게 아니었다. 9월28일 제주도에서 별도 항복문서 조인식이 있었다. 제주도 방어를 위해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던 대규모 일본군을 의식한 미군은 대령을 대표로 하는 38명의 대표단을 제주도로 파견해 일본 육군 제58군을 대표하는 도야마 노보루 중장과 해군사령관 하마다 쇼이치 중좌, 제주도지사 센다 센페이로부터 항복 조인을 받았다. 서울과 똑같이 제주농업학교에서 열린 이 조인식에도 육군과 해군을 대표하는 군인과 행정부를 대표하는 관료가 각각 참석해 서명했다. 항복문에 대한 질문은 일절 허용되지 않았고, 서명만이 있었을 뿐이다.
조선인은 자치 능력이 없다?
해방자로서 미군의 존재는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종료됐다. 남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세운 미군정은 새로운 주권자이자 자치정부임을 자처했다. 미군은 한반도 남쪽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인식했다.
미군정의 인식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보자. 조선총독부 총무과장 야마나 미키오는 미군 리머 아고 대령에게 총독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니 한국인 유력자를 등용해 인사 쇄신을 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아고 대령은 현상 유지로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야마나가 “조선인은 미군을 독립의 복음을 가져오는 구세주로 환영하는데, 어떠한가?”라고 묻자, 아고는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태도를 보고, 야마나는 미군 장교들이 한국인의 통치 능력을 조금도 평가하지 않으며, 한국의 독립은 아직 멀었구나 하고 깨달았다 한다.
하지 장군은 9월9일 항복식 직후 기자회견에서 행정 업무 수행과 통치권 인수를 위해 아베 총독과 일본인 관리들이 임시로 계속 재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일본인 관리들이 되도록 빨리 미국인들로 교체되고 그 뒤 조선인들로 교체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계속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발표는 조선인들에게 당혹과 실망을 안겨줬다. 하지 장군은 조선 독립이 ‘미래 어느 시기’에 주어질 것이라고 무책임하게 말했다.
해방 뒤 미국은 조선인을 ‘해방된 인민’으로 간주했지만, 군사점령과 연이은 냉전 격화는 조선의 즉시 독립을 먼 미래의 일로 미루게 했다. 연합국이 표방한 민족 독립이라는 이념적 좌표는 어느새 사라졌고, 제국의 재편만이 과제로 남았다.
미군정의 정책은 조선인의 독립국가 건설 활동을 꺾는 것으로 나타났다. 8월15일 이후, 남한과 북한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등 자치정부 수립 운동이 계속 일어났다. 전국에서 자연스럽게 조직됐던 건국준비위원회는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직전인 9월6일 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이는 조선인의 정부 수립 능력과 의지를 각인하려는 의도였다. 조선인의 정치적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 하지 장군의 국무부 정치 자문이던 머럴 베닝호프는 “남한은 불꽃이 튀면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화약고로 묘사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즉각적인 독립과 일본인 소탕이 실현되지 않아서 (조선인이) 크게 실망하고 있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조선은 주인 없는 땅?미군정은 조선인의 정치적 능력과 열망을 무시하며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해나갔다. 1945년 10월 아널드 군정장관의 성명으로 남한에서 유일한 정부는 군정뿐이라고 주장했다. 미군은 조선인들의 자치정부 수립 노력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남아 있는 지방인민위원회는 물리적 폭력으로라도 반드시 무너뜨리고자 했다. 한국현대사 연구자 브루스 커밍스의 말대로 “미군정은 점령기 첫 1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각 도에서 일어난 수백 건의 인민위원회를 탄압하는 데 보냈다.”
통치는 무력뿐만 아니라, 합리화를 필요로 한다. 군사력으로 이루어진 식민지 재점령을 정당화하려면 국제법적 인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떤 국제법 조문을 가져오더라도, 예전 식민지를 점령해 통치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1946년 주한 미군정의 법률 고문에 부임한 에른스트 프랑켈은 미군정의 역할과 법적 지위를 논의하는 ‘주한미군정의 구조’라는 중요 보고서에서 “결국 조선의 해방은 조선 인민의 혁명적인 행동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통치는 전승국의 결의와 미·소에 의한 결의의 실행을 통하여 종식되었을 따름이다. 1945년 8~9월에 미군과 소련군이 조선을 점령했을 때 그들은 국제법 관점으로 보아 ‘임자 없는 땅’(no-man’s land)을 점령한 것이었다”고 했다. 군사점령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된 국제법의 ‘무주지론’(無主地論)은 폭력의 다른 이름에 불과했고, 식민지배를 유지했던 제국에는 자신을 납득시키는 자기기만적 법이었다.
프랑켈은 주한미군정이란 “남한 내의 유일한 정부로서 주권의 담당자”라고 정의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선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주권을 세우고, 인민을 대표하는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었고, 조선인은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활동으로 자치 능력을 증명했다. 하지만 해방 직후 벌어졌던 조선인의 자치정부 수립 노력은 미군정에 완전히 말소됐다. 미군정이 주장한 것처럼, 조선이 원래부터 무주지였던 것이 아니고 통치 능력이 없어서 신탁통치를 받아야 하는 저열한 정치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조선을 무주지로 만든 것은 미군정 통치의 결과였다.
제국에서 제국으로 이양된 권력1945년 여름에 일어난 ‘해방’과 ‘점령’이라는 두 계기는, 한국현대사의 흐름을 결정짓는 분수령이었다. 일장기는 내려졌지만,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은 성조기였다. 조선인은 성조기가 곧 태극기라고 여겼지만 짝사랑일 뿐이었다. 식민지 권력은 독립자주 국가의 권력으로 교체되지 않은 채, 단지 제국에서 제국으로 이양됐던 것이다. 희망찬 삶의 기대는 분단과 몇 년 뒤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가장 큰 희망을 품었던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깊은 좌절을 맛봐야 했다. 점령은 이렇게 짧은 해방을 덮어버렸고, 점령-분단-전쟁은 지금의 휴전 체제를 만들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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