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개의 질문, 하나의 답.
지난 1년 동안 14명의 심리학자와 정신과 전문의를 인터뷰한 결론이다. 각각의 인터뷰이에게 행복에 대한 15~20개의 질문을 던졌으나, 대답은 하나였다. 바로 ‘관계’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대한민국이 불행한 이유 </font></font>약 30년의 역사를 가진 ‘행복학’이 숱한 실험을 통해 내린 결론도 마찬가지다. ‘관계’다. ‘행복학의 대가’인 에드 디너 미국 일리노이대학 교수는 200여 명을 설문조사해서 쓴 논문 ‘매우 행복한 사람’(Very happy people)에서 상위 10%의 행복한 사람들이 나머지 사람들과 보인 가장 큰 차이가 돈이나 건강, 재산이 아니라 ‘관계’임을 밝혔다. 미국 하버드의과대학 조지 베일런트 교수가 하버드대학 졸업생 268명을 72년 이상 추적 관찰한 연구의 결론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이며, 행복은 결국 사랑”이라는 것이다. 1955년 하와이 카우아이섬에서 태어난 아기 833명을 30년간 추적 조사한 심리학 연구의 결론도 같다. 당시 카우아이섬 주민 대다수가 지독한 가난과 약물중독, 질병 등에 노출됐고, 이들의 과반수가 부모처럼 중독과 범죄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3분의 1은 환경에 발목 잡히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했다. 이들을 가르는 분기점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신뢰와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가 한 명이라도 있느냐 없느냐였다.
그럼 재산·학력·지능·외모 등의 외적 조건과 행복의 상관관계는 어떠할까? ‘세계 100대 행복학자’로 꼽히는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저서 에서 “인생의 여러 조건들, 이를테면 돈·종교·학력·지능·성별·나이 등을 다 고려해도 행복의 개인차 중 약 10~15% 정도밖에 예측하지 못한다. 몇 해 전 한국심리학회에서 체계적으로 조사한 한국인의 행복에 대한 결론도 이와 비슷하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차이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재산, 직업, 사회적 지위, 연봉 등의 물질적 조건이 행복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 어느 수준까지는 정비례한다. 먹고살 수 있는 순간까지다. 밥 세끼를 먹고, 아플 때 병원에 가고, 오늘 밤 어디서 자야 할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까지 물질적 조건의 영향력은 크다. 노숙을 하고, 배를 곯으면서 행복을 논할 순 없다. 하지만 생존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 물질적 조건의 영향력은 미미해진다. 그때부터 압도적 변인은 관계다. 부모, 자녀, 배우자, 회사 동료 등과의 관계가 좋으면 행복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면서도 행복지수 수준이 아프리카와 남미에도 못 미치는 이유다. ‘행복이 경제순’이라면 대한민국은 세계 10위의 행복대국이어야 하는데 말이다.
김태형 심리학자는 이에 대해 “90년대 외환위기 사태와 신자유주의 확산을 겪으며 한국인의 불행도와 자살률이 가파르게 증가했다. 관계와 공동체가 파탄 나면서 불행해진 것인데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인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래서 그의 행복 해법은 관계와 공동체 복원이다. “돈과 이익을 기준으로 맺어지는 관계에서 벗어나 정말로 친밀하고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요즘은 가정에서도 돈으로 자식을 대한다. 공부 못하면 사람 취급을 안 한다. 가정과 가까운 친구 사이부터 관계를 복원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30평형대 아파트에 사는 중산층 4인 가족이 행복도를 확실히 높이려면 부부 사이, 혹은 부모와 자녀 사이를 좀더 살갑고 친밀하게 만들어야 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음식 그리고 사람 </font></font>그렇다면 왜 이렇게 ‘관계’가 인간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이 큰 걸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것도, 화려한 문명을 이루고 산 것도, 연약한 육체임에도 생존에 성공한 것도 모두 사회와 무리를 이루고 살았기 때문이다. 사회 없이 인간의 생존과 번영은 불가능했다. 행복학 연구가 ‘관계’가 행복에 중요한 변인이라는 걸 알려준다면, 진화론은 ‘왜 관계가 행복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가’를 설명해준다. 그건 인간에게 ‘관계=생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행복학 연구의 결과가 진화론과 절묘하게 만나는 지점이다. 그래서 진화론적 관점에서 행복을 설명하는 서은국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행복의 핵심을 사진 한 장에 담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이다. 문명에 묻혀 살지만, 우리의 원시적인 뇌가 여전히 가장 흥분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다. 음식 그리고 사람.”
부모와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배우자와의 관계, 동료와의 관계, 상사와의 관계…. 수많은 관계가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관계는 무엇일까? 바로 ‘나 자신과의 관계’다.
김혜남 정신과 전문의는 30년간 의사로 일하면서 가장 많이 본 환자들의 고통은 “관계 내의 고통”이라고 답했다. “관계는 부모-자식, 친구, 직장 동료, 애인 등의 형태가 있는데, 사실 그 관계는 결국 자기와의 관계다. 자기가 자기를 믿고 객관화하고 좋아하면 남들을 좋아하게 되고, 남들도 자기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이승욱 정신분석가 역시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의 고민은 현상적으로는 다양하다. 하지만 그 고민의 층위를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면 결국은 자기 문제다. 모든 사람이 ‘고통이 외부에서 왔다’고 이야기하지만, 상담을 계속해보면 자기 안에서 어떤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했다.
나 자신과 관계가 좋다는 것은 쉽게 말해 ‘자존감이 높다’는 거다. 그건 나 자신을 괜찮게 생각하고, 나 자신에 만족하는 상태다. 많은 심리학자와 정신과 전문의는 자존감의 바탕이 어린 시절 부모와 맺은 상호작용에서 형성된다고 말한다. 조선미 아주대 의대 교수는 어린 시절 부모와의 상호작용이 성인기 사회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들이 평생 갖고 가는 기본 틀, 건물로 치면 바탕이 있다. 그게 부모하고 주고받은 상호작용이다. 태어나서부터 10년 사이에 부모와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했는지가 틀로 만들어진다. 이 틀이 평생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반복된다. 예를 들어, 내가 잘못했을 때 엄마가 늘 ‘괜찮다’고 말해준 사람은 직장에서도 상사가 ‘이게 뭐야?’라고 해도 얼지 않는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감정은 수용하되 행동은 훈육하라</font></font>부모에게 있는 그대로 존중받고 이해받은 사람은 자존감이 높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 존중받고 이해받는다는 게 뭘까? 공부를 못하고 대학을 못 가고 취직을 못해도, 존중받고 이해받는다는 걸까? 키가 작고 인물이 보잘것없고 성격이 까칠해도, 존중받고 이해받는다는 걸까? 전문가들은 수용의 대상이 이같은 객관적·물리적 조건이 아닌 ‘감정’이라고 말한다.
부모는 아이가 좋아하고, 기뻐하고, 웃고, 행복해할 때 아이를 수용하기 쉽다. 그걸로 혼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이가 울고, 싫증 내고, 화내고, 짜증 낼 때 부모에게 수용되기는 쉽지 않다. 혼나고 벌서고, 심지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정적 감정 역시 부모가 온전히 수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 감정을 수용하는 것이 나에 대한 진짜 인정이며, 내 감정이 내 정체성(아이덴티티)이기 때문이다. 이인수 정신과 전문의는 “건널목에 10명이 서 있을 때, 초록불이 켜지면 길을 건넌다는 것은 10명이 다 안다. 그것으로 ‘나’라는 사람을 정의할 수 없다. 하지만 초록불이 켜질 때의 감정은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기쁠 수도, 어떤 사람은 우울해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 감정이 그 사람인 거다”라고 말한다. 남들과 다른 내 감정이 ‘나’라는 존재의 핵심인데, 내 감정이 억압당하고 부정당하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억압·부정당하는 것이고, 그러면 나는 ‘내 원래 모습은 못나고 숨겨야 하는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물론 울고불고 떼쓰며 짜증과 분노가 많은 아이를 ‘오냐오냐’ 받아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감정은 수용하되 행동은 훈육하라는 게 최성애 HD행복연구소 소장이 말하는 ‘감정코칭’이다. 짜증 내는 감정은 받아주되, 짜증이 난다고 욕하고 물건을 던지는 행동은 제지해야 한다는 거다.
그럼 이미 다 자라버린 성인들의 자존감은 어찌할 것인가? 다행히 자존감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의 저자 윤홍균 정신과 전문의는 “우리가 신의 자존감이었다면 영원하겠지만, 인간의 자존감이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다”고 말한다. 최성애 소장은 “연구에 따르면, 부잣집에서 태어나 경제적으로 잘살 가능성의 상관계수는 40살까지다. 하지만 40살 이후엔 상관계수가 없다. 부모가 돈을 물려줘도 사업으로 망할 수도 있고, 도박으로 탕진할 수도 있다. 부모가 정서적으로 안정적으로 잘해줬어도 자녀가 정서적으로 잘살 가능성의 상관계수는 거의 40살까지다”라고 말한다. 나이 마흔이면 내 정서와 행복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그럼에도 부모 탓을 멈추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박미라 마음칼럼니스트는 “성인들도 각각의 시기에 발달과제가 있는데 그 발달과제를 지연시킬 뿐 아니라, 이를 외면하고 지연시켜 발생된 문제까지도 모두 부모 탓으로 돌리면서 살아가게 된다”고 지적한다.
김용태 기독교상담학자는 한발 더 나아가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이 삶이 저 삶으로 그대로 간다”고 경고한다. 즉, 부모와 내가 맺는 관계가 내가 배우자나 자녀와 맺는 관계에서 그대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관계는 부모와 맺었던 관계의 재현”이라고 했다. 맞고 자란 자녀가 때리는 부모가 되고, 알코올중독 아버지 밑에 자란 딸이 알코올중독 남편을 만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심지어 내가 신과 맺는 관계조차 부모와의 관계가 재현한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먼저 나 자신, 내 감정을 알아야 </font></font>그럼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걸까? 먼저,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 내 정체성이란 내 감정이다. 나만의 감정 스펙트럼을 알고, 그 감정들의 연원을 파악하는 게 먼저다. 그리고 내 감정들을 격려하고 지지하고 이해하면 된다. 마치 우는 아이를 엄마가 위로하고 달래주듯이. 그러면 멈췄던 성장과 발달이 시작된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 과거의 자장 안에 붙들려 있던 나의 자아와 정서, 인격이 독립하면서 그때부터 진짜 내 삶이 시작된다.
‘행복의 파랑새’는 가까이에 있다는데, 대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서 떠난 길이었다. 그 길에서 만난 밑도 끝도 없는 ‘우문’에 친절하게 ‘현답’을 들려준 열네 분의 심리학자와 정신과 전문의에게 감사드린다. 난 행복을 물었고 관계를 거쳐 성장이라는 답을 얻었다.
김아리 자유기고가 ari9303@naver.com<font size="2">*이번 회를 끝으로 ‘김아리의 행복연구소’를 마칩니다.</font>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font color="#C21A1A">http://bit.ly/1HZ0DmD</font>
카톡 선물하기▶ <font color="#C21A1A">http://bit.ly/1UELpok</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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