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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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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노력순이 아니잖아요

“행복의 개인차는 유전” “외향성은 행복의 열쇠”

서은국 교수가 진화론적 관점에서 말하는 행복
등록 2017-08-16 22:54 수정 2020-05-03 04:28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감을 느낀다!”

삶의 중요한 가치로서 행복이 아니라, 생존 도구로서 행복을 말하는 학자가 있다. 오랫동안 ‘행복’을 주제로 연구하며 ‘세계 100대 행복학자’로 꼽히는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저서 에서 진화론적 관점에서 행복의 본질을 파헤친다. 서은국(사진) 교수는 “행복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지만, 인간이 왜 행복을 느끼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며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왜 행복을 느끼고 어떨 때 행복을 느끼는지도 효과적으로 설명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기존 행복 연구와 진화론적 관점이 내리는 행복의 결론은 같다. 돈이나 학력, 직업 등 객관적 조건보다 사회적 경험이나 관계가 행복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먹고 자는 것 이상으로 ‘사회성’이 생존에 끼치는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사회적 자극이 중요한 이유 </font></font>은 기존 행복에 대한 책과 달리 진화론적 관점을 도입했다.

학계에서 진화론 연구자와 행복 연구자는 전혀 다른 세계에 있다. 이들 사이에 커뮤니케이션도 없다. 진화론에선 ‘감정’은 얘기하지만 행복은 얘기하지 않고,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행복은 인간의 숭고한 가치’라고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머리로 만들어낸 관념이다. 이 관념은, 인간의 가치·욕망·이상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행복과 가장 관련 있는 현상은 ‘쾌감’이다. 먹고 자는 것, 영화를 보면 즐거운 것 등을 다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쾌감이다. 사람마다 문화마다 다르게 조합된 플레저(쾌감) 덩어리를 행복이라고 한다. 플레저는 뇌에서 만들어진 경험인데, 이것의 본질은 생물학적·진화론적 관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고찰해보면, 묘하게도 지금까지 행복 연구가 내려온 큰 틀의 결론과 진화론적 연구가 내놓은 결론이 일치한다.

두 연구의 일치하는 결론은 무엇인가.

첫째, 객관적 조건(돈·물질·학력 등)이 행복을 크게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게 행복에 대한 지난 30여 년에 걸친 연구의 큰 결론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감정’은 생존에 유리한 것에 접근하게 하고 위험한 것에서 도망가게 하는 일종의 신호다. 신호는 뭔가 하나 좋은 것을 얻었다고 해서 영원히 켜져 있으면 안 된다. 공복에 점심을 먹으면 좋아야 하지만, 조금 있다가 꺼져야 다시 저녁 먹을 생각을 하게 된다. 밥뿐만 아니라 모든 게 그렇다. 객관적 조건이 영원한 행복감을 못 만드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둘째, 그럼 행복에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물었을 때, 떠올릴 수 있는 답은 사회적 경험이다. 행복한 사람들의 특성은 사회적 자극이 많다는 것이다. 사회적 자극은 왜 중요할까? 행복 연구에선 그 질문 자체를 안 던진다. 사회적 자극이 중요하다고만 말한다.

진화론적으로 보면, 호모사피엔스라는 동물은 원래 먹이사슬의 중간에 위치했다. 이들이 먹이사슬 위로 올라간 배경은 가장 빠르고 힘이 세서가 아니라, 지능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지능이 왜 높아졌느냐에 대한 최근 연구들을 보면, 갑자기 영양분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인간이 ‘슈퍼 소셜한 사회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수반된 게 ‘높은 지능’이었다. 사회적 생활 여부가 생존을 결정했는데 이에 필요한 것이 머리 쓰는 일이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지?’ ‘내가 거짓말을 해도 믿을까?’ ‘그가 지금 좋다고 하는데 진짜일까?’ 이게 가장 고차원적인 사고다. 이런 사고 때문에 지능이 높아진 것이다. 추위와 더위, 음식 같은 생물학적 리소스(자원)를 제외하면 호모사피엔스의 생존을 좌우했던 절대적 자원은 사람이었다. 쾌감이 생존에 이점이 되고 필요한 것에 관심 갖고 좇아가게 한다면, 당연히 쾌감의 신호는 생존에 가장 중요한 리소스를 찾을 때 켜진다. 그래서 먹는 즐거움이 가장 크고, 성적 욕구도 크고, 그것 못지않게 사회적 욕구가 크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행복은 마음먹기 나름?</font></font>행복이 생존 도구라는 건 당신이 최초로 내놓은 주장인가.

진화론적 관점은 인간의 감정에 대해 유구한 세월을 통해 생존에 필요하고 이점이 됐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심리학에선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진화론적 이야기가 심리학과 큰 관련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심리학은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의 모습을 연구했는데, 인간은 결국 사고하는 ‘동물’이라며 진화론이 판을 깨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 왜 질투를 느낄까? 특정 상황에서 질투를 느끼지 못한 사람은 질투를 느끼는 사람보다 생존 확률이 낮았고, 적절한 수준의 질투를 느낀 사람이 결국 유전자를 남기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은 그냥 있는 게 하나도 없고, 우리가 생각지 못한 기능을 한다. 그럼 행복은 뭘까? 본질적으로 ‘감정’이다. 좋다, 즐겁다, 신난다 이런 걸 크게 묶으면 긍정적 감정이다. 긍정적 감정의 기능에 대해 진화론적 관점에서 연구하던 사람들이 옛날부터 하던 주장이 내가 하는 이야기와 맥락이 같다. 책을 쓴 동기는 이렇다. 한국에서 얼마 전부터 ‘행복’ 개념이 뜨고 있는데,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이고 감사하면 되는 것이고, 그래서 네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네 잘못이라거나 네 소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등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이야기가 오가기 때문이다. 행복의 개인차는 유전이다. 내가 유전적으로 쾌활한 성격이 아닌데, 감사하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행복의 개인차가 유전이라는 것은, 같은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좀더 긍정적으로 느끼고, 어떤 사람은 좀 덜 긍정적으로 느낀다는 건가.

그렇다. 선천적으로 그런 차이가 있다.

행복이 유전적 차이에 따라 결정된다면, 행복해지기 위해 개인이 하는 노력은 무의미한 것인가.

유전적이라는 말의 뜻은, 편의상 행복을 100m 달리기라고 할 때 나 같은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100m를 16초에 달릴까 말까이지만, 유명한 선수들은 훈련도 안 하고 자다가 라면 먹고 달려도 12초에 뛴다. 그런 선천적 개인차가 있는데 이는 당연히 유전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노력하면 조금 더 빨라질 여지는 있다. 열심히 체력훈련을 하면 2초 정도 달리기 기록을 당길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무조건 노력하면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정서적 경험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자기계발서는, 너는 어떻게 생겨먹었든지 간에 감사해라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내가 열심히 골프 연습을 하면 타이거 우즈가 될 수 있다는 것만큼이나 과장된 얘기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내향적 사람도 사람 만나면 더 행복해 </font></font>그럼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아마추어 골퍼가 아무리 노력해도 타이거 우즈는 되긴 어렵다. 그러나 타이거 우즈건 아마추어 골퍼건 한 타를 줄일 방법은 있다. 그게 행복에선 사람을 많이 만나는 거다. 선천적으로 행복도가 높은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행복에서 ‘외향성’이 키(key)다. 행복의 개인차를 예측할 때의 키도 외향성이다.

행복과 외향성이 큰 상관관계가 있다는 건가.

절대적이다. 더 행복하고 덜 행복하고를 예측하는 변인은 5천여 개 된다. 수많은 변인 중 가장 독보적으로 예측 결과가 잘 맞는 것은 외향성이다. 외향적 사람이라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개인차보다 외향성 점수가 높은 사람이 행복할 확률이 높다. ‘나는 내향적인데도 행복할 때가 있다’는 반박이 나올 수 있는데, 내향적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내향적 사람이 무지하게 행복할 때가, 외향적 사람이 행복하지 않을 때와 강도가 비슷하다. 내향적 사람도,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혼자 있을 때보다 사람이랑 있을 때 더 행복해진다는 거다. 실험적으로 많은 논문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외향성 외에 행복한 사람들의 특징이나 조건으로 무엇이 있나.

외향성 같은 개인적 변인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총체적 행복을 좌우하는 것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나 문화의 특성이다. 행복해지려면 우선 자유감이 있어야 한다. 결혼하고 싶으면 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하고, 직장은 꼭 삼성에 취직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감이 필요하다. 개인의 행위와 일상의 습성을 지지하는 문화적 가치가 풍부한 사회에선 행복해지기 유리하다. 덴마크나 스칸디나비아반도 지역의 문화가 그렇다. 그런데 사사건건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하고, 여기서 벗어나면 ‘루저’거나 ‘아웃’이라며 하나의 잣대로 모든 인간을 구겨넣으려는 문화에서는 사회적 요구에 상당한 희생을 감수하면서 행복감을 추구해야 한다. 결국 이윤이 남지 않는 장사가 된다. 집단주의적·수직적·획일적 사회인 한국, 일본, 싱가포르가 경제적으로는 잘살지만 행복하지 못한 이유다.

그러면 경제적 수준이나 물질은 행복과 상관관계가 없나.

그렇지는 않다. 물질은 비타민 같은 것이다. 결핍이 있으면 안 된다. 먹고 잘 데도 없는데 행복하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비타민은 필요량을 채우면 더 먹는다고 이득이 없다. 이처럼 물질과 행복의 상관관계도 정비례하다 어느 선에서 멈춘다. 한국은 비타민 과잉 사회다. 찢어지도록 가난할 때는 고깃국 한번 먹으면 행복도가 확 올라가지만, 이제는 물질을 더 많이 투자한대도 행복 아웃풋이 크게 나오지 않는다. 돈이 아닌 다른 것을 투여해야 행복의 차이가 나타난다.

진화론과 유전적 관점에서 행복을 설명했다. 우리는 꼭 행복해야 하나, 행복하면 좋은가.

같은 값이면 행복한 게 좋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언제나 행복한 것은 큰 그림에서 보면 그리 건강하지 않은 호모사피엔스의 모습이다. 슬플 때 슬퍼야 하고, 화날 때 화내야 한다. 24시간 행복한 것이 이상적 모습도 아니고, 장기적으로 이점이 많은 삶도 아니다. 삶은 행복해지기 위해 디자인된 것이 아니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려고 해가 뜨는 것도 아니다. 큰 자연의 법칙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다. 되도록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은데, 그게 마음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이 행복해져야 하겠다는 압박은 조금 덜 느꼈으면 좋겠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더 행복한 게 더 좋은 건 아니다 </font></font>‘세계 100대 행복학자’로 꼽히는데, 행복한가.

행복은 유전이기 때문에 나는 평균보다 조금 더 행복한 거 같다. 늘 하는 얘기지만, 내 여동생은 행복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나보다 더 행복하다. 행복은 선천적인 것이다. 여동생은 굉장히 외향적이고 낙관적이다. 그런데 더 행복한 게 더 좋은 것은 아니다. 여동생이 나보다 더 행복하지만, 여전히 나는 나로 태어나고 싶다. 각자에게 장단점이 다 있기 때문이다.

<font color="#008ABD">글</font> 김아리 자유기고가 ari9303@naver.com
<font color="#008ABD">사진</font>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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