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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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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득 차 있으면 출렁이지 않는다

고통의 근원은 무엇이며 어떻게 치유할 수 있나…

<상처 떠나보내기>를 쓴 이승욱 정신분석가 인터뷰
등록 2017-07-06 08:23 수정 2020-05-02 19:28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톨스토이의 소설 의 첫 구절이다. 대문호의 통찰처럼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만 가지다. 제각기 다른 불행과 고통의 사연과 마주하는 상담가들은 어떻게 공감하고 이해하며 결국엔 치유할 수 있을까. 이승욱 정신분석가의 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이 책은 5명의 내담자가 처음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부터 상담실을 떠나는 그날까지 정신분석가와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내담자들이 어떤 저항과 협력 과정을 거쳐 상처를 치유하는지 그들이 나눈 대화와 한숨, 눈물, 표정까지 생생히 묘사해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이자 ‘닛부타의 숲 정신분석클리닉’ 원장인 이승욱씨는 정신분석 과정을 “자기에 대해 가진 신념이라고 불리는 망상을 깨뜨리고 자신과 친해지는 과정”이자 “새로운 자기가 탄생하고 등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양한 고민, 결국 자기 문제다

내담자는 대체로 무엇을 고민하나.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자식, 남편, 부모 문제. (웃음) 이건 농담이고, 그들의 고민은 현상적으로 다양하다. 하지만 고민의 층위를 하나하나 벗겨내면 결국 자기 문제다. 모든 사람이 ‘고통이 외부로부터 왔다’며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배우자와의 불화, 직장 동료, 친구, 연인 관계에서 반복되는 좌절도 계속 상담하다보면 자기 안에서 문제를 발견한다. 자기 문제와 가장 많이 연관된 부분은 생애 초기 부모와 맺었던 관계다. 나와 부모의 초기 관계와 그 속에서 납득이 안 되는 경험이 마음 안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 찾아나가면 문제가 밝혀진다.

심리적 고통에 시달려도 상담실 문을 두드리기까지 굉장히 망설이게 된다.

상담을 망설이는 분들의 이유는 다양하다. 상담료가 비싸다, 시간이 없다, 주변 사람들이 ‘왜 그런 걸 받냐’며 반대한다 등이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자기를 만날까봐’이다. 상담실 문을 두드리기 전에 명확하게 알진 못하더라도 왠지 그럴 거 같은 막연한 느낌이 든다. 추하고 혐오스럽고 형편없고 초라한 자기 모습을 발견할까 두려워한다. 그것은 내담자가 상담 과정에서 가장 많이 호소하는 고통이자 두려움이다.

무의식적 저항이 있음에도 상담실 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어떤 사람인가.

두려움보다 고통이 더 클 때 온다. 내가 아는 한, 내담자 대부분은 정말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 변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유지할 방법을 찾기 위해 온다. 예를 들어 연애에 계속 실패한 사람이 되돌아보니 과거의 연애가 매번 비슷한 패턴으로 깨졌다는 걸 깨닫고, 책도 읽고 강의도 듣고 주변 사람들을 붙들고 하소연해봐도 해결이 안 될 때, 더 이상 고통을 나눌 대상이 없을 때 상담실을 찾아온다. 합법적으로 돈을 주고 고통을 재생 반복해 말할 수 있는 대상을 찾기 위해서 온다. 그걸 비난할 순 없다. 상담실에서 그 문제가 재생 반복돼야지만 상담자는 내담자의 문제가 무엇이고, 어떤 구조를 띠며, 어디서 비롯되고, 어떤 현상을 만들어내고, 이걸 통해 어떤 쾌락을 느끼는지 알 수 있다.

일반 심리상담과 정신분석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아는 심리상담은 문제 해결, 고통 경감, 갈등 해소 중심적이다. 정신분석은 여기에 큰 관심이 없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천장의 어느 부분에 비가 샌다고 해서 바로 그 윗부분의 지붕에 구멍이 난 게 아니다. 저 멀리 지붕의 구멍으로 들어온 비가 흘러흘러 천장의 이 구멍에서 비가 샐 수 있다. 상담은 바로 눈에 보이는 천장의 구멍을 막거나 지붕에 비닐을 씌워 일단 천장에서 비가 새지 않게 하는 거다. 분석은 지붕을 다 해체해 구조를 바꾸거나 다시 짜맞추는 것이다. 구조를 다 맞추면 비가 안 새는 건 당연하다. 정신분석에서 갈등이 사라지거나 고통이 경감되는 건, 일종의 ‘부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정신분석은 갈등이 사라지거나 고통을 경감시키는 걸 목적으로 하지 않지만, 부산물처럼 갈등이 사라지거나 고통이 경감되는 효과를 본다.

결정하는 인간이 주체적 인간

정신분석의 목적은 뭔가.

나에게 정신분석의 목적은 단 하나다. ‘자기’라는 텍스트를 연구하는 작업이다. 자신에 대한 연구자가 되는 거다.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최소한 내가 나와 협력할 수 있고, 내가 나와 친해지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친하지 않다.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거나, 자신에게 분노하거나, 자신을 형편없게 여기거나 과신하는데, 이건 친한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또 우리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 대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만 관심 있다. 그건 타인에게 관심 있는 거지 나에게 관심 있는 게 아니다. 정신분석은 결국 많은 관심과 집중과 에너지를 자기에게 돌리는 작업이다.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어떤 시점이 지나면 자기 존재를 인정하고 수용하게 된다.

자기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고통이 사라지나.

인간의 삶에서 어떻게 고통과 갈등이 사라지게 할 수 있겠는가.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지만, 부처 주변에 갈등이 없었겠나. 수많은 갈등이 있었다. 분석을 거치고 어느 순간이 되면, 내가 이 고통을 지속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고, 내가 이 갈등을 수용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결정되거나 결정당하는 게 아니라, 결정하는 힘이 생긴다. 어떤 결정이든 결정하는 인간이 주체적 인간이다. 에리히 프롬 등 많은 분석가와 철학자가 이야기하듯, 선택하는 순간이 바로 주체가 되는 순간이다.

분석을 통해 자기 민낯을 알면 어떻게 자신과 친해질 수 있나. 자신에게서 더 도망가고 싶지 않을까.

인간을 살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판단하게 하고, 행위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신념이다. 정치적·종교적 신념도 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자신에 대한 신념이 있다. 즉,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난 이걸 못해’ ‘이걸 좋아하지 않아’ 생각했는데, 어느 날 우연찮게 해보고 ‘내가 이걸 좋아하네’ ‘이걸 할 수 있네’ 알게 된 경험이 누구나 한두 번은 있다. 그래서 나는 신념이란 말을 ‘망상’으로 바꾸고 싶다. 분석하다보면 내가 못났다고, 형편없다고, 수치스러운 인간이라고 믿고 살았다는 것과 이런 신념이 다 망상이었음을 알게 된다. 자기 신념을 알아내고 또 그 신념이 망상이었음을 통렬히 깨달으면, 외로운 내가 탄생한다. 부모 등 누군가 부여한 내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내가 드러나고 새로운 자기가 탄생한다.

우리 삶에서 탄생이 트라우마다

주변에 정신분석이나 상담을 받고도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말하기 안타깝지만, 전적으로 상담자 탓이다. 내담자 탓이 아니다. 가끔 치료가 안 되는 내담자도 있다. 상담자를 착취하려 하거나, 병리적 상태에 있거나, 태어날 때부터 뇌병변계에 이상이 있으면 심리적 처치는 불가능하다. 가정폭력·성폭력 등으로 심리적 내상을 너무 깊게 입거나 오래 지속돼, 몸속에 체질화된 사람도 치료하기 어렵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 상담이나 분석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면, 상담자 때문이다.

상담으로 자기를 발견할지에 대한 두려움과 변화에 대한 저항이 커서 상담이 도움이 되지 않는 건 아닐까.

분석가들 사이에 이런 말이 있다. “분석 관계에서 유일한 저항은 분석가 자신밖에 없다.” 내담자가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상담가가 변화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거다. 불치병을 가지고 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잘 관리해서 병으로 쓰러지지 않게 하자고 한다. 어떤 처치만 하면 나을 수 있는데도 못했다면, 의사가 그 병을 정확히 들여다보려 노력하지 않은 거다. 마찬가지로 상담자도 그만큼 고민하지 않은 거다.

인간 고통의 근원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일단 탄생 자체가 고통이다. 인간의 존재가 발생하고 죽을 때까지 가장 안전하고 안정되고 편안했던 시간이 엄마 뱃속이다. 숨을 안 쉬어도 되고, 씹지 않아도 되고, 모든 빛에서 차단돼 있고, 굉장히 부드럽고 따뜻한 점액질 상태에서 몸을 맘대로 움직일 수 있다. 10개월쯤 돼서 나온 세상은 빛이 쏟아지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처음 폐호흡을 해야 하고, 느닷없이 거꾸로 들어져서 맞아야 한다. 지금까지 느꼈던 것과 너무나 다른 감각은, 죽음 같은 고통을 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삶에서 탄생이 트라우마다. 그게 우리 몸속에 저장돼 있다. 다음으로 인간의 근원적 고통은, 나보다 타인이 존재론적으로 먼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목적지향적으로 호명하는 첫 번째 대상이 엄마다. 평생 우리는 ‘나, 나, 나’ 하며 사는데 왜 처음 호명하는 대상은 내가 아니라 타자일까. 아이에겐 나와 타자의 구분이 없다. 그래서 나에게 가장 많이 얼굴을 들이미는 존재가 ‘나’인 것이다. 타자가 나를 호명해주지 않으면 나는 발생하지 않는다. 평생 타자가 나를 어떻게 볼지 신경 쓰며 살 수밖에 없다. 그게 본질적인 고통이다.

100% 좋기만 하고 100% 나쁘기만 한 건 없다

정신분석학자인 당신은 고통을 어떻게 해결하나.

내가 이해하는 부처는 고통이나 갈등을 겪지 않는 사람도 아니고, 기쁨이나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아니다. 부처는 한 존재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과 감촉을 느끼는 충만한 사람인데, 다만 충만함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을 뿐이다. 밀폐 용기 안에 물이 틈 없이 가득 차 있으면 출렁이지 않는다. 물이 덜 차 있으면 출렁인다. 자기 존재에 대해, 세상에 대해, 관계에 대해, 자기가 느껴야 할 고통의 그림자와 긍정적 면을 다 느끼고 인정하고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다면 불안하지 않게 그 자체로 완전히 굴러갈 수 있다.

‘고통의 바다’라고 불리는 인생을 좀 덜 고통스럽게 건널 방법이 있다면.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노인은 말이 처음에 사라졌을 때 “나쁜 일이 아닐 것이다”라고 생각했고, 말이 다른 말을 데려왔을 때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해서 그 일의 그림자가 없을 리 없고, 나쁜 일이 생겼다고 해서 그 일의 좋은 면이 없을 리 없다. 그래야 일희일비하지 않고 덜 흔들릴 수 있다. 그게 충만한 상태다. 어떤 일이 100% 좋기만 하고, 100% 나쁘기만 한 게 아님을 받아들이면, 살면서 발생하는 일을 좀 덜 고통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김아리 자유기고가 ari9303@naver.com
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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