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이는 개그계의 ‘안경 선배’예요.”
개그맨 김숙은 지난 2월24일 열린 KBS 2TV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안경 선배’는 빙판 위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화제를 모은 여자 컬링 국가대표팀 주장 김은정 선수의 별명이다. 김 선수처럼 송은이도 “후배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리더라는 것이다.
김생민·김숙 띄우며 제2의 전성기
‘포용의 리더십’으로 떠오른 송은이는 요즘 대세다. 김숙, 김신영, 안영미 등 후배들과 함께 만든 프로젝트 그룹 ‘셀럽파이브’로 주목받는다. 맨발에 짙은 화장을 하고 독특한 ‘칼군무’를 선보이는 셀럽파이브의 뮤직비디오 영상 조회수는 100만 회를 넘었다. 그는 휘성의 를 패러디한 개그맨 김영철의 뮤직비디오 도 만들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지난해에는 ‘짠테크’ 김생민 캐릭터를 발굴하고 프로그램을 기획·제작했다. 더불어 ‘가모장숙’ ‘숙크러쉬’라는 별명을 얻으며 인기를 끈 개그맨 김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그렇게 올해로 데뷔 26년차인 송은이는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뒤에서 남들을 빛나게 하던 그가 자력갱생으로 얻은 결과다.
송은이의 날갯짓이 시작된 것은 2015년 4월 팟캐스트 (이하 )을 하면서다. 은 “결정장애를 앓고 있는 5천만 국민을 위한 속 시원한 고민 해결 상담소”라는 콘셉트를 들고나왔다. 이후 남성 진행자, 남성 출연자, 정치 이슈 중심의 ‘남초 세계’가 되어버린 팟캐스트 분야에서 여성이 중심이 된 신선한 시도를 한 것이다.
알음알음 알던 PD와 작가들과 함께 시작한 은 대박이 났다. 방송 초기 누적 다운로드 수 1700만 회를 기록해 팟캐스트 전체 1위를 차지했다. 같은 해에 콘텐츠 기획 제작사인 ‘콘텐츠랩 비보’를 설립하고 2016년 2월 유튜브에 모바일 방송국 ‘비보TV’를 개국했다. 기존 지상파에 안주하지 않고 ‘뉴미디어가 대세가 된다’는 시대의 변화를 읽고 새로운 도전을 한 것이다.
도전의 출발점은 물론 절박한 위기였다. 그는 한동안 방송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TV 밖’ 팟캐스트를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송은이는 2014년 4월 방영한 tvN 에서 “진행자가 아닌 이상 애나 시어머니가 없어서 방송을 못한다”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미혼의 개그우먼은 남편과 시댁 이야기를 하는 줌마 예능, 육아 예능에 출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예능계는 유재석·강호동·이경규 등 남자 개그맨이 중심인 남초 현상이 극심했다. 2015년 MBC 예능총회에 나왔던 김숙도 “2015년은 남자 판이었다. 여자 예능인이 살아남기 힘든 해였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일이 없어지니까 ‘이 길이 아닌 것 같다’며 적성검사를 했다”는 송은이의 이야기도 들려줬다.
여성은 왜 수동적 역할만 맡는가물론 지금도 바뀐 것은 없다. 대한민국 예능계는 여전히 여성에게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주요 예능 프로그램 등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남성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남녀 출연진이 함께하는 도 있지만, 주로 남성이 메인 MC를 맡고 여성은 보조 진행이나 패널 같은 부차적 존재에 그친다.
그러나 스스로 판을 벌인 ‘TV 밖’의 인기를 발판으로 송은이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2015년 11월 SBS 러브FM 진행을 맡게 됐다. 팟캐스트 의 한 코너였던 ‘영수증’은 지상파로 진출해 KBS 으로 태어났다. 송은이는 김숙, 김생민과 함께 이 프로그램의 진행도 맡았다. 셀럽파이브의 인기로 음악 프로그램에 이어 MBC 에브리원 과 JTBC 에도 출연했다.
TV로 돌아온 송은이는 프로그램 안에서 배려와 소통을 기반으로 한 리더십을 보이고 있다. 그는 따뜻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유쾌한 웃음과 편안한 감동이 흐르는 ‘착한 예능’을 보여준다. 안상은 PD는 “송은이는 후배들을 잘 챙기는 수더분한 언니 같다. 거침없는 언행으로 재미를 주는 김숙씨와 예능을 많이 안 한 김생민씨 사이에서 그들이 멘트를 잘할 수 있게 돕고 정리하는 일을 한다”고 평가했다. 그렇게 프로그램 안에서 ‘플레잉코치’(경기에 선수로 뛰면서 팀원들을 지도하는 일을 병행하는 사람) 역할을 톡톡히 한다는 얘기다. 김선영 TV평론가도 송은이의 인기에 대해 “송은이씨가 주도해 인기를 끈 팟캐스트 모두 상담 형식의 프로그램이다. 송은이씨는 경청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 능력 덕분에 공감의 언어가 나온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송은이는 TV에서나 라디오에서나 아는 언니 같은 친근함으로 게스트의 진솔한 얘기를 끌어낸다.
배려와 소통 돋보여안 PD는 “지금의 예능은 독설과 호통, 갈등 조장 등 치열한 생존경쟁을 보여주는 과거 예능과 많이 달라졌다. 요즘은 출연자들이 서로 챙겨주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재미를 중요시한다. 시청자의 공감을 얻는 것도 중요하다. 송은이씨가 보여주는 예능이 그렇다”고 했다. 수직 서열 구조를 강조하는 ‘형님 리더십’으로 굴러가는 예능 프로그램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더불어 페미니즘 책 의 최지은 작가도 “송은이씨는 방송 매체의 공적 역할을 중요하게 여긴다. 방송에서 용어도 조심해서 가려 쓴다. 어휘력도 풍부하고 정확한 말을 쓸 줄 안다”고 했다.
여기에서 그쳤다면 송은이 현상은 한동안 주목을 못 받았던 미혼 개그우먼의 화려한 재기 스토리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그의 진정한 강점은 여성성을 기반으로 한 뛰어난 기획력이다. 2016년 계간지 여름호에 ‘김숙이라는 현상’을 쓴 심혜경 영화연구자는 “송은이씨는 김수용, 김생민, 김영철 등 자기 옆에 있던 어려운 타자들과 함께 가는 행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수용은 유재석, 김용만 등이 함께한 모임 ‘조동아리’ 멤버 중에서 가장 주목을 덜 받은 인물이고, 김생민은 스타를 인터뷰하는 리포터로만 활동했다. 그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판을 깔아준 건 오랜 시간 그들을 지켜본 송은이였다.
새판 짜는 크리에이터송은이는 하루하루 치열한 경쟁에서 생존을 고민하는 후배 개그우먼들에게 새로운 롤모델이 되고 있다. 개그맨 곽현화는 “그동안 여성 예능인들은 수동적 존재로 그려졌다. 송은이 선배는 콘텐츠를 직접 만들고 프로그램을 주도하며 그런 편견을 깨고 있다”고 했다. 남성 MC가 예능프로그램의 기둥이 되면서 만들어온 ‘유재석 라인’ ‘강호동 라인’ 등 남성 연대를 형성한 연예계에서 송은이는 자신의 힘으로 결정적 균열을 일으켰다. 이런 선배가 등장했다는 것은 후배 개그우먼들에게는 무척 반가운 일이다. 심혜경 영화연구자는 “송은이와 김숙이 함께 만든 독립 제작사 콘텐츠랩 비보를 통해 여성 연대의 미디어 시스템에 주목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곳의 콘텐츠가 남성 중심 예능 프로그램들 속에서 여성이 주도해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의 형식·내용·시스템을 고민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란 기대가 담겨 있다. “콘텐츠랩 비보는 모바일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는 모바일 버라이어티도 제작하고 있다. ‘나는 급스타다’ ‘비보 레전드’ ‘ 뮤직비디오’ 등에선 원색적이고 날것 그대로의 소재를 살려 자유롭게 콘텐츠를 만든다.”
송은이는 개그우먼으로서, 콘텐츠 창작자로서 자신의 길을 활짝 열고 있다. 김선영 TV평론가는 “송은이씨는 기존 판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판을 기획하고 설계하는 크리에이터다. 그가 보여주는 크리에이터의 능력이 중요해진 지금과 같은 시기에 송은이씨가 일으키는 새로운 바람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송은이는 TV, 라디오 활동을 하면서도 팟캐스트를 놓지 않고 시청자와 소통하며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송은이가 확장해가는 새로운 판이 기대되는 이유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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