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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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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후 영어’ 망국론

인기 영어책 작가 김민식·문성현이 말하는 조기교육 해선 안 되는 이유

“인공지능 시대 영어 조기교육은 국가적 낭비… ‘방과후 독서’가 더 중요”
등록 2018-02-23 09:38 수정 2020-05-03 04:28

주요 서점에서 외국어 분야 베스트셀러에 오른 영어학습법 책의 제목을 쭉 따라 읽어보면, 영어 배우는 일은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처럼 보인다. …. 책에 따르면 짧게는 하루 만에, 길게는 석 달이면 영어로 말문이 트인다!

쉬운 ‘어른 영어’, 어려운 ‘학부모 영어’

쉽고 저렴한 학습법이 난무하는 ‘어른 영어’의 반대 쪽에는 ‘학부모 영어’가 있다. 학부모에게 영어는 한 살이라도 더 빨리 시작해야 하고, 고가의 영어유치원은 물론 조기유학까지 불사하게 하는 난제 중의 난제다. 어린이집과 유치원 방과후 영어 교육을 금지하려던 교육부는 학부모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고, 1월16일 대국민 사과까지 했다. 어른이 배우기에는 쉬운 영어가 아이한테 가르치는 일이 될 때 국가적 난제로 돌변하는 부조리는 왜 생기는 것일까.

2월3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김민식 MBC 드라마 PD와 문성현 한국토지주택공사 과장은 이 부조리함을 규명할 수 있는 적임자로 보인다. 이 둘은 지난해 외국어 분야 출판시장을 ‘들었다 놓은’ (위즈덤하우스)와 (넥서스)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써낸 작가다. 는 지난해 10만 부 이상 팔렸고, 이 책에 소개된 은 지난해에만 70쇄를 추가로 찍었다.

이들은 ‘투머치’(too much·격에 맞지 않게 지나친 상황)한 ‘과잉 영어’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적정 영어’를 익히면 된다고 주장한다. 영어 발음이 ‘별로’라는 (한국 사회에서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고, ‘영어 책은 냈지만 영어 인터뷰는 못한다’며 자기 영어 실력을 포장하지도 않는다. 이들의 당당한 비주류 영어를 내 아이가 익혀야 하는 영어의 답으로 삼을지는 기사를 읽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교육학자가 영어 조기교육이 나쁘다고 말해도 부모들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공한 영어 만학도 두 분이라면 말발이 서지 않을까 해서 모셨다. 두 분 다 아이를 키우는 아빠니까, 아이들 영어 교육은 어떻게 하나 궁금했다.

문성현 아들 영어 때문에 어제 또 아내랑 싸웠다. 엄마가 아이에게 아빠 앞에서 영어를 해보라고 시켰다. 그런데 애가 싫어하는 거야. 나도 싫고. 틀려도 좋으니까 큰 소리로 해보라고 했지만 결국 (우리가 없는) 저쪽 구석에서 하더라. 아내는 애를 이렇게 방치해도 되냐고 골이 났다. 영어가 필요한 시기가 오고, 그때 집중해서 하면 된다는 얘기를 와이프는 ‘방치’라고 서운해한다.

김민식 나도 집에서 늘 싸운다. 책을 쓴 이유가 아내와 나의 영어 공부 접근법이 너무 달라서였다. 아내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시켜야 한다 생각하고, 나는 반대한다. 말로 해도 아내를 설득할 수 없으니 책으로 썼다. 나는 영어 조기교육과 관련해 말 못할 상처가 있다. 영어 조기교육은 득보다 실이 크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말씀드린다.

득보다 실이 큰 영어 조기교육어른 영어 책을 쓴 계기가 자녀 영어 교육 때문이라니 의외다.

김민식 어린 시절에 영어를 잘해도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된다. 주변에서 흔한 일이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1·2학년 영어 방과후 수업을 폐지하는 게 맞다고 보는 게, 영어 공교육 연령이 낮아질수록 사교육 연령도 낮아지고 비싼 사교육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 “어머니 ABC는 해서 보내셨어야죠”라는 말이 나오면, 부모들은 아이를 영유(영어유치원)에 보낼 수밖에 없다. 옆집 아이가 필리핀 영어캠프에 갔다와 말문 트인 것을 보면, 자기 아이도 그곳에 보낸다. 필리핀에 갔다오니, 또 미국 갔다온 그 옆의 옆집 아이를 보고 결국 엄마들이 1억원 들여 아이와 함께 미국에 간다. 미국에서는 당연히 영어를 잘할 수밖에 없다. 영어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거기선 영어를 하지 않으면 친구도 못 사귀고 밥도 못 먹으니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다. 문제는 한국에 돌아온 뒤다. 미국과 언어 환경이 다르니 빨리 까먹는다. 그걸 막으려고 비싼 돈 내고 귀국 자녀반에 가고, 다시 유학을 간다. 결국 거기서 대학까지 나오는데 한국에서 취업이 되나? 안 된다. 영어를 어려서 시켜야 한다고 믿는 한, 지옥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문성현 솔직히 한국 사람은 영어를 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 같은 언어환경과 생활환경에서 영어를 잘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영어가 뭘까, 나에게 필요한 영어가 어떤 수준인지 고민하는 게 맞다. 그것에 영어 교육의 답이 있다. 그런데 어른부터 그런 고민 없이 느닷없이 미국 방송 《CNN》을 보고, 미국 드라마를 본다. 보기 좋은 영어가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영어를 해야 한다. 외국 여행지에서 생겨나는 문제를 불편함 없이 영어로 잘 해결하면, 아이들이 엄마 아빠를 달리 본다. 그 정도면 원하는 거 다 얻는 것 아닌가. 쓸데없이 자신에게 필요 없는 공부를 왜 하나. 공부로 하니까 싫어지는 것이다.

김민식 대학 2학년 때 영어 성적이 D+였다. 군대에서 방위병 생활할 때 영어 공부를 시작해 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에 가고, 이 나이 되어 베스트셀러도 썼다.

문성현 학사장교(ROTC)였다. 그때만 해도 학사장교 출신들은 대기업에서 모셔갔다. ‘토익 같은 영어 공부는 취업에 자신 없는 애들이나 하는 거야’라던 시절이다. 군복무 시절에 외환위기가 왔고 전역 뒤 사회에 나왔더니 회사 지원서를 써도 면접에서 불러주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영어 공부를 해야 하나, 그제야 생각했다. 28살 때였다.

김민식 심지어 서른 다 되어 영어를 시작한 거네.

문성현 대한민국, 대통령, 부모님을 원망했다. 왜 내가 이런 불필요한, 써먹지도 않을 영어를 해야 하나. 너무 하기가 싫었다. 안일한 과거에 대한 응징인가 하고 그냥 받아들였다. 서점에 가서 EBS 를 샀다. 고교 이후 처음 보는 영어책이었다. 이후 아침 7시30분 집에서 나와 밤 9시30분 집에 돌아갈 때까지 이어폰으로 영어만 들었다. 구내식당에서도 이어폰 꽂고 혼자 밥 먹었다. ‘너는 고통을 느껴봐야 해!’라는 심정이었다. 일주일 연습한 내용은 주말에 오프라인 모임을 만들어 거기 나가 풀었다.

영어는 시기보다 동기가 중요
‘돈 안 드는 영어’의 전도사 문성현 과장(오른쪽)과 김민식PD. 김 PD는 <뉴 논스톱> <내조의 여왕> 등을 연출한 스타 PD로, MBC 파업 때 ‘파업요정’으로도 유명해졌다.

‘돈 안 드는 영어’의 전도사 문성현 과장(오른쪽)과 김민식PD. 김 PD는 <뉴 논스톱> <내조의 여왕> 등을 연출한 스타 PD로, MBC 파업 때 ‘파업요정’으로도 유명해졌다.

김민식 영어는 혼자 하는 연습이 제일 중요하다. 혼자서 문장 외우고 소리 내어 말해봐야 한다. 원어민 앞에 아이들 앉혀놓고 원어민 말을 들려주면 영어가 자연스레 트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영어 조기교육은 투자 대비 효용이 안 좋다. 사교육 관계자들이 내 블로그에 와서 ‘스무 살 넘어 영어책 외워서 좋은 학교 갈 수 있냐’고 댓글을 단다. 아니, 좋은 학교에 가는 게 인생의 목표인가.

문성현 광주 영어 방송에서 영어 인터뷰를 하자고 요청이 왔는데, 못한다고 그랬다. 영어 자존감이 생기니까 나 못하는 건 못한다고 쉽게 인정한다. 자존감이 낮을 때는 ‘책 쓴 사람이 그것밖에 안 돼?’라는 소리를 들을까 노심초사했다. 이젠 아니다. 그런 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나는 내가 필요한 거만 해요’라고 말할 수 있다.

김민식 사람들은 항상 어떤 교재로, 어떤 방법으로 공부하냐고 묻는다. 영어는 ‘왓’(what)이나 ‘하우’(how)가 중요하지 않다. ‘와이’(why)가 중요하다. 영어 조기교육, 영어 사교육이 왜 의미가 없냐면 아이들은 ‘와이’(why)가 없다. 투자한 만큼 효과가 나올 수 없다. 영어는 시기보다 동기가 중요하다.

회사 다니면서 영어 쓸 일이 있나.

문성현 없다. 지금 하는 업무에서도 영어 쓸 일이 없다. 사실 취업하면 90%는 영어를 놓는다.

김민식 올해 20년 만에 처음으로 영어 공부한 빛을 봤다. 영국 방송 《BBC》와 드라마 판권 계약을 하러 2월 중순 영국 런던에 출장 간다. 회사에서 드라마 PD가 가야 하고 영어를 해야 하는데, 두 조건에 맞는 사람이 MBC에 나밖에 없다더라. 엄마 아빠들이 영어를 왜 시킬까. 영어를 잘하면 교환학생, 해외 지사 파견 같은 좋은 기회를 얻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옛날에야 영어 잘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니까 그들이 좋은 기회를 얻은 게 맞다. 그건 부모 세대의 경험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영어가 계속 변별력을 가질까? 어릴 때 아버지가 어른 되면 꼭 필요한 기술이라고 돈 주고 학원 가서 배우게 한 게 있다. 주산과 서예·펜글씨였다. 영어도 똑같다. 구글 번역기로 해도 되는 일이 있다. 구글 알파고가 인간과의 바둑 대결에서 이긴 게 언제냐. 이런 상황에서 부모 세대가 먹고살려면 영어를 해야 한다며 가정경제의 상당 부분을 영어 교육에 쓰고, 대여섯 살 때부터 아이들 영어 교육을 하는 문제를 두고 국가적 논쟁을 할 일인가. 30∼40대 부모들, 영어 못한 게 아쉬우면 본인들이 지금부터 하면 된다. 아이한테는 과도하게 시키지 마라. 자기 세대의 경험일 뿐인데 왜 아이를 통해 대리만족을 하나.

영어 공부, 어른 돼서 해라두 분 다 좋은 직장을 다닌다. 요즘 신입사원들은 영어 잘하는 게 사실 아닌가.

문성현 당연히, 우리 얘기가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다. 현실에선 평가가 있다. 중·고등학교 때 배우는 영어 수준이 뻔한데, 그걸로 토익 900점을 맞으라고 하니, 10원 주고 100원 달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사교육으로 자꾸 간다. 누구를 떨어뜨리기 위한 영어, ABC 등급을 매기기 위한 영어를 하는 것이다. 우리 아이도 어릴 때 하루 2시간씩 영어학원을 다니면서 스트레스를 크게 받았다. 학교에 가면 영어로 평가를 받아야 하니, 부모 처지에선 시키게 된다. 내 손으로 교육과정을 만들고 싶다. 촛불로 정권을 바꿨듯이, 평범한 사람들이 영어 교육을 바꾸는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

김민식 아내와 아이 영어 교육 때문에 많이 싸운다. 아내는 “당신이 영어 아무리 잘해도 발음은 별로야”라고 한다. 나는 지적을 인정한다. “꼭 발음이 좋아야 해? 의사소통만 하면 되지 않아?” 아내는 동의하지 않는다. 부모라면, 돈 더 들여 잘할 수 있다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변을 보면 일찍 유학 갔다 와서 영어만 잘하고 사회·역사·과학을 못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사회나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뉘앙스의 문제다. 한국어로 복잡 미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모국어가 흔들리면, 창의성과 자기표현 능력이 중요해지는 인공지능 시대에 정말 큰일이 난다. 영어 교육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국가적 낭비다. 미취학 아동, 초등학교 1·2학년 아이들에게는 ‘방과후 영어’가 아니라 ‘방과후 독서’가 필요하다. 원어민 선생님보다 사서 선생님을 1명이라도 더 배치하는 게 낫다. 영어 공부는 어려서 하는 것이 아니다. 어른이 되어서 하는 거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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