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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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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히로시마 거리에 선다면

관찰자에서 참여자의 위치로 이동시키는 가상현실의 또 다른 가능성
등록 2017-10-14 00:16 수정 2020-05-03 04:28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 솟아오른 버섯구름. 한겨레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 솟아오른 버섯구름. 한겨레

현재 주목받고 있는 신기술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가상현실’(VR·Virtual Reality)이다. 페이스북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가 2014년 체험기기 제조사 ‘오큘러스’를 인수하고 지난해 가상현실을 소셜미디어의 미래로 지목하면서 큰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지금은 머리 위로 ‘헤드기어’를 쓰고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실험적인 콘텐츠가 게임·영화 업계에서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저널리즘 영역에 미치는 영향도 큰 관심사다. 시청자가 중동의 전쟁터나 폭풍이 다가오는 항구도시를 텔레비전으로 시청하는 게 아니라 몸소 들어가 체험할 수 있다면 뉴스의 가치는 어떻게 달라질까? 그런 변화가 제작 방식이나 대중의 담론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이번 학기 저널리즘 스쿨에서 수강 중인 가상현실 제작 과목에서도 이런 기대와 관심이 흐르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가상현실은 영상이 그러했듯이 현실의 다른 공간뿐 아니라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도 우리를 이끌 수 있다. 가상현실의 몰입감은 체험 당사자를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의 위치로 이동시키기 때문에 영상을 넘어서는 강렬한 기억을 뇌리에 남긴다. 이미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역작 으로 1912년 침몰 순간에 이 배에서 벌어진 놀라운 사건을 시각적으로 제시했지만, 이를 실제 배 안을 살린 3차원 공간에서 체험한다면 이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사고는 영화 때와 또 달라질 것이다. 우리나라라면 한국전쟁이나 광주민주화운동의 경험을 실감나는 가상현실 체험으로 재현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는 우리의 당시 역사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런 경험이 긍정적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주 가상현실 수업에선 짧은 토론이 있었는데, 9·11 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 내부의 체험을 재현하는 것에 대한 의견을 교수가 학생들에게 물은 것이다. 아직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미국인지라, ‘대체 누가 그런 경험을 원할 것인가’부터 ‘9·11의 의미와 무게감을 느끼기에 적절한 콘텐츠’라는 평가까지 다양한 의견이 존재했다. 어떤 이에게는 소중한 역사적 경험일지라도 어떤 이에게는 지우고 싶은 끔찍한 기억일 수 있다. 우리라면 참사 당시 세월호 내부를 재현한 가상현실이 비슷한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유사한 사례로 최근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와 관련된 가상현실 프로젝트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히로시마 시에선 원폭 전의 시를 재현한 가상현실 콘텐츠를 개발해 앱으로 내놓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일본의 한 개발자는 일반에 미공개로, 폭탄 투하 당시를 재현하는 콘텐츠를 개발 중이라고 한다. 이를 체험해본 교수는 이렇게 묘사했다. “헤드기어를 쓰면 폭탄이 터지기 전의 히로시마 거리에 서게 된다. 아직 사람을 재현하는 수준까지는 안 돼서 그냥 건물만 볼 수 있고, 내부로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거리를 거닐며 호젓함을 즐길 수 있다. 그러다 갑자기 경보가 울린다. 불안하게 숨을 곳을 찾아보지만 피할 곳은 없다. 결국 떨어지는 원자폭탄과 불바다, 남는 잿더미를 고스란히 경험하게 된다.”

최근 한국에서 ‘탈핵’을 둘러싼 찬반 논쟁이 거세지고 있다. 반대하는 쪽이나 찬성하는 쪽 모두 전문가의 근거를 제시하고 복잡한 사안이라 판단이 쉽지 않다. 이런 문제일수록 다양한 관점과 입장을 지닌 이들의 깊은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히로시마나 체르노빌, 후쿠시마 같은 원자력 재앙 현장에 대한 가상현실 콘텐츠도 가세한다면, 논의의 풍부함을 더하는 좋은 소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원전의 경제적 가치나 효율 측정에는 전문가가 있을 수 있지만, 이런 재앙의 위협에 대해서는 직접 겪어보지 않는 한 전문가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미래팀 기자 sage5t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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