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저널리즘 공부를 위해 지난 6월 미국에 도착한 뒤 가장 무서웠던 일은 ‘영어로 전화하기’였다.
1980~90년대 한국 정규교육을 통해 영어를 배운 여타 한국인처럼 난 회화에 취약하다. 마주 보고 이야기하면 눈짓·몸짓 등 다양한 정보를 취합해 얼추 대화가 되는데, 송수화기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이런 힌트가 모두 차단되니 상대방이 건넨 시답지 않은 농담 한마디에도 돌팔매 당한 개구리처럼 당황하다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어디든 정착하려면 전화할 일이 많은 법이다. 전기, TV, 인터넷 설치부터 자동차나 의료보험 등록까지. 인터넷을 통한 일 처리가 막히면 어쩔 수 없이 수화기를 들게 된다. 이때 나만 믿고 미국까지 따라온 아내는 ‘능력을 보여줘’라는 지긋한 눈빛을 던진다. 그 앞에서 망신을 당하느니 ‘아무도 안 받으면 좋겠다’는 모순된 바람 속에 전화가 연결되는 순간, 나를 안도하게 만드는 것이 있으니 바로 인공지능 상담원이다.
미국에선 대부분의 전화 상담이 인공지능으로 대체됐다. 인간 상담원과 연결해주는 메뉴도 있지만, 기본 용무는 대부분 기계가 해결해주니 여간 안심되는 게 아니다. 무딘 발음도 무난히 알아들을 정도로 기특할 뿐 아니라, 미심쩍으면 또렷한 발음으로 되물어 확인하니 믿음직스럽다. 덕분에 여러 잡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미국이 선진 정보기술(IT)을 도입하는 데 둘째라면 서러운 한국보다 인공지능 상담원 도입 분야에서 앞서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역시 인건비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이주 선배들이 자주 하는 이야기가 “미국에선 일단 사람 손이 들어가면 비싸다”는 것이다. 20달러짜리 자동차 부품 하나 교체하는 데도 정비공 용역이 들어가면 200달러가 추가되는 식이다. 전화 상담 업무를 멀리 인도로 외주화하던 미국의 인건비 절감 전쟁의 최전선이 인공지능 도입으로 옮겨왔다.
올해 초 제4차 산업혁명 신년기획을 취재할 때 일이다. 대형마트 노동조합을 방문해 자동계산대나 로봇 물류처럼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 없는 신기술 도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노조 간부는 현장에서 느끼는 일자리 위협 등을 이야기한 뒤 “근데 사실 우리나라의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고 덧붙였다. 그의 말인즉, 기업이 ‘비정규직 인간’을 데려다 쓰는 비용이 워낙 싸기 때문에 인공지능을 도입할 이유가 별로 없을 거란다.
최근 한국에서 최저임금 인상이 화제다. 정부가 내년 최저임금을 시간당 7530원으로 올해보다 16.4% 올리자 고용주 쪽 반발이 거센 듯하다. 지금 경제 여건에서 적절한 최저임금 수준이 얼마인지 말을 보탤 만한 지식이 내겐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미래 생존이 걸렸다며 그토록 많은 관심을 갖는 4차 산업혁명과 이 문제를 연결해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기업의 자발적 혁신 동력은 필요에서 온다. 인간의 노동을 존중하지 않는, 즉 노동에 충분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는 사회에서 노동을 대체하는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할까. 4차 산업혁명이 대세라니 따라하는 시늉이 아니라 진짜 혁신의 욕구가 분출할까 하는 말이다. 물론, 진정한 인간 존중이라면 혁신으로 인해 사라지는 일자리의 선제적 대책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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