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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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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밥도 집밥 나름

종교 심취해 오신채 제한 채식만 고집한 어머니…

소고깃국·참가자미조림으로 막 올린 나의 집밥 시대
등록 2017-09-28 04:59 수정 2020-05-03 04:28
집밥도 집밥 나름이다. 한겨레 이병학 선임기자

집밥도 집밥 나름이다. 한겨레 이병학 선임기자

대부분 사람에게 집밥은 소박하지만 맛깔난 손맛이 담긴 밥상을 의미한다. 집밥이란 말을 들으면 누구나 향수에 젖은 표정을 짓고 입속에 고인 침을 조용히 삼키는데, 이건 순전히 집밥을 하지는 않고 먹고만 싶어 하는 사람들의 환상이 아닐까 싶다.

“오늘 뭐 먹지?”라는 잔잔한 기대가 “오늘 뭐 해먹지?”로 바뀌는 순간 무거운 의무가 된다. 집에서 해먹는 게 집밥이라면, 집집마다 그 집 부엌칼을 쥔 사람이 다른데 어떻게 죄다 소박하면서 맛깔날 수 있단 말인가. 집밥이 무조건 맛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임이 분명하지만, 옳지는 않다.

언제부터 내가 집밥을 싫어하게 되었는지는 비교적 명확하다. 어머니가 현실에 절망해 종교로 도피해버린 뒤부터다. 어머니가 왜 절망했고 어떤 종교로 도피했는지는 얘기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어머니는 종교에 심취해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파·마늘·양파·부추·달래 같은 ‘오신채’라 불리는 양념조차 입에 대지 않기로 결정했다. 흔히 오신채는 향이 짙어 귀신의 접근을 막는 식재료로 알려졌다. 어머니가 신봉하는 종교의 교리에 따르면, 억울한 귀신이나 혼령들의 접근을 막는 것은 참으로 야멸차고 비정한 짓이며, 그들이 다가오면 우리는 반갑게 맞이해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그들과 마음을 트고 지내야 하므로 오신채를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결단이 우리 집 식탁에 불러온 결과는 엄청났다.

어머니는 젓갈은커녕 아무 양념도 없이 김치를 담갔다. 그러니 발효가 될 리 없었다. 배추김치는 배추절임이었고 깍두기는 무절임이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한달 두달을 해괴한 김치에 검푸른 나물과 씁쓸한 된장국만 먹고 살다보니 우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둘 부엌으로 숨어들어 몰래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부담도 덜어주고 각자 입맛도 충족하니 일거양득이라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어머니는 우리의 셀프요리 행태를 적발하고 노기등등하여 이 집에서는 당신이 만든 음식만 먹어야 하며 당신의 부엌에서 임의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행위는 일절 금지한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귀신에게조차 그토록 자비로운 종교를 믿는 어머니가 왜 우리에게는 이토록 억압적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땐 몰랐지만 어쩌면 어머니는 우리가 음식을 하면서 풍기는 그리운 고기와 양념 냄새를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지금도 나는 당시 우리 집 식탁의 처참한 음식들을 생각하면, 우리를 에워싸고 구경하며 “여긴 정말 우리를 못 오게 훼방 놓는 음식이 아무것도 없군” 하고 기쁜 낯빛으로 수군거렸을 귀신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만 같다. 그게 아마 어머니의 종교가 꿈꾸던 이상적 풍경이었을지 모른다.

20대 후반 비록 반지하방이긴 해도 처음 독립해 자취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내 부엌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 방에서의 첫 식사를 아직도 기억한다. 이사를 마치고 피곤한 와중에도 나는 기운을 북돋워 시장에 나가 소고기와 콩나물, 말린 참가자미와 양념거리를 사왔다. 소고기에 콩나물과 대파를 넣어 시원한 고깃국을 끓이고 말린 참가자미에 양념장을 듬뿍 넣어 조렸다. 내 조그만 자취방은 금세 맛난 고기와 생선, 양념 냄새로 가득했다. 훌륭한 만찬에 소주까지 곁들이니 부러울 게 없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드디어 어머니의 집밥 시대가 끝나고 내 집밥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앞으로 집밥을 좋아하게 될지 싫어하게 될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내 손에 달렸다는 것을.

권여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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