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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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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내 순서와 방식으로

첫 외식으로 먹은 부산 냄비국수의 추억,

그리고 원하는 스타일로 먹는 것의 중요성
등록 2017-08-16 23:17 수정 2020-05-03 04:28
나만의 냄비에 담긴 뜨거운 국수가 먹고 싶다. 한겨레 자료

나만의 냄비에 담긴 뜨거운 국수가 먹고 싶다. 한겨레 자료

여름 끝물 더위가 더 참기 힘들게 느껴지는 건 너무 오랫동안 더운 음식을 못 먹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식탐자는 맛에 대한 욕망만큼 온도에 대한 욕망도 크다. 벌써 입속엔 가을이 왔는지 뜨거운 국물 음식이 그립다. 지금은 엄두를 못 내지만, 찬바람만 불어봐라 곧바로 냄비국수를 해먹고 말리라, 잔뜩 벼르고 있다.

요즘은 밖에서 음식 사먹는 걸 ‘매식’이라 하지만 내가 어릴 때 그건 당당히 ‘외식’이라 불렸다. 외식은 생일이나 소풍, 아버지의 휴가만큼 특별했다. 내 아버지는 일본 선박회사의 선원으로 석유를 실어나르는 ‘탱카’라는 거대한 배를 타고 항해했다. 그래서 1년에 열 달 이상은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딸 셋, 이렇게 네 모녀만 살았다. 어머니는 절약이 몸에 밴 옛날 여인인데다 남편이 망망대해에서 고생하는데 우리만 호의호식할 수 없다는 마음에서 매우 검소한 식단으로 일관했다. 그런 어머니 입에서 ‘외식하자’는 말이 나오는 날은 1년에 한두 번 정도였다.

그때만 해도 남의 돈을 받고 음식 파는 사람들은 적어도 보통 사람들보다 요리 솜씨가 출중했고 식재료도 대부분 국산이어서 손님을 속이고 말고 할 게 없었다. 돈이 없어 못 사먹는 게 한이었지 요즘처럼 피 같은 돈을 내고 매식을 한 뒤 쓰레기를 먹었구나 싶은 생각에 화가 치밀거나 식당을 나오면서 주인의 파렴치한 얼굴을 새삼 쏘아보는 일은 드물었다. 또 요즘엔 매식할 때 집밥 같은 음식을 선호하지만 예전에 외식할 땐 짜장면·우동·가락국수처럼 집에서 해먹지 않는 가루음식, 즉 분식을 선호했다.

내 생애 첫 외식 음식도 국수였다. 지금도 나는 국수 하면 부산 구덕산 밑에 있던 길쭉한 목로가 놓인 그 국숫집이 떠오른다. 그 집에선 오직 냄비국수 한 가지만 팔았는데 작은 냄비에 멸치국물을 붓고 팔팔 끓이다 달걀을 깨트려 넣고 흰자가 하늘하늘하게 익어갈 즈음 삶아놓은 국수를 담고 그 위에 유부와 어묵, 쑥갓과 다시마를 웃기로 얹어 내놓았다. 물론 그 집 국수 맛은 따로 설명할 필요 없이 맛있었다.

그러나 처음 외식하던 날 나는 국수를 맛보기도 전에 심한 충격에 빠졌는데 그건 한 사람 앞에 냄비 하나씩이 놓였기 때문이다. 집에서 식사할 때 우리 네 모녀는 늘 찌개냄비를 밥상 한가운데 놓고 각자 밥공기에 덜어 먹었다.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심지어 라면도 그렇게 먹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 앞에 냄비 하나를 통째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국수가 오로지 나만을 위한 냄비에 담겨 나온 것이다. 아무도 내 냄비 속의 달걀노른자를 함부로 터뜨려 국물을 흐리지 않았고, 내가 유부와 어묵만 쏙쏙 골라 먹어도 나무라지 않았다. 막내라 늘 음식을 덜 먹고 빼앗긴다는 억울함이 골수에 사무쳐 있던 나로서는 누구 눈치도 볼 필요 없이 나만의 국수를 오로지 내가 원하는 순서와 방식으로 먹을 수 있다는 데 엄청난 감동을 느꼈다.

뭔가를 먹고 만족하려면 맛과 온도도 중요하지만, 원하는 스타일로 먹는 것도 중요하다. 밥 먹을 때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이 있는데, 그건 개도 자기가 원하는 스타일로 음식을 즐길 권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나는 몸서리치게 국수가 먹고 싶은데, 그냥 그릇에 담긴 국수 말고 나만의 냄비에 담긴 뜨거운 국수를, 살짝 숨이 죽은 쑥갓부터 건져 먹고 반숙인 달걀노른자를 호로록 먹고 양념장을 한꺼번에 풀지 않고 조금씩 국수에 끼얹어 먹는 식으로, 그렇게 나만의 스타일로 먹고 싶다.

권여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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