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든 설날이든 명절 때 나는 아무 데도 안 간다. 친정도 없고 시댁도 없기 때문이다. 명절에 차례도 안 지내고 함께 모이지도 않는 집안을 ‘콩가루 집안’이라 한다면 나는 콩가루 집안 출신의 콩가루다. 이런 내 사정을 아는 사람들, 특히 또래 여성들은 나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른다. 콩가루에 대한 로망을 가진 그들은 한술 더 떠 긴 연휴 동안 자유롭게 여행을 가라고 권하는데, 이건 뭘 몰라도 한참 몰라서 하는 소리다.
여행을 별로 즐기지 않는 탓도 있지만, 내 생각에 긴 연휴 동안 집구석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만이 집을 떠나 어디로든 여행 가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집에서 너무도 자유로운 나는 더 자유롭기 위해 굳이 여행 떠날 필요를 전혀 못 느낀다. 그리고 설사 여행 가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평생 취업 한번 하지 않고 자유 직종에 종사하며 살아온 자유인으로서의 윤리랄까 도의랄까 그런 게 있어 번듯한 직장인들이 놀러 가고 고향 가고 여행 갈 때는 되도록 안 움직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들이 출근해서 열심히 일할 때 여유롭게 여행 가면 될 걸, 하필 말도 못하게 붐비는 명절 연휴에 티켓과 여로를 놓고 그들과 경쟁할 필요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런 뜻에서 이번 추석에도 여행을 계획하지 않았는데 콩가루가 되어본 적 없는 가여운 사람들은 내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꾸 여행 타령을 했다.
그래도 명색이 명절인데 나도 추석 전후로 몇 가지 음식을 만들어 먹기는 했다. 시장이나 마트가 며칠씩 쉬니 미리 반찬거리를 준비하는 차원에서였다. 식생활에서만은 제법 계획적인 데가 있는 나는 추석 며칠 전부터 뭘 만들어 먹을지 한동네에 사는 언니와 면밀히 상의했다. 언니도 갈 데 없는 콩가루이고, 그런 까닭에 우리 자매는 서로에게 든든한 친정이 되어주는 사이다. 차례상에 올릴 음식이 아니니 자유롭게 두 콩가루가 먹고 싶은 걸로만 결정하면 됐다. 우리는 동그랑땡과 김치찌개, 갈치구이와 콩나물국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 이 무슨 이상한 조합인가 싶겠지만 술자리를 떠올리면 모든 게 이해된다.
남부럽지 않게 전 하나는 부쳐야지 싶어 전 중에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동그랑땡을 부쳐 안주로 먹었고, 기름내 맡고 전 부치느라 속이 느끼하니 신김치에 돼지목살을 넣고 얼큰하게 찌개 끓여 안주로 먹었고, 명절이라고 너무 고기만 먹으면 안 되지 싶어 생선을 물색하다 올해는 갈치 시세가 적당하니 큰 놈 한 마리 사다 소금 툭툭 뿌려 노릇노릇 구워 안주로 먹었고, 연일 음주로 힘든 속은 아침마다 파 듬뿍 넣은 콩나물국으로 다스렸다. 하루는 우리 집에서 먹고 다른 하루는 언니네 집에서 먹었다. 연휴가 끝나갈 즈음 양쪽 집구석에 먹을 게 하나도 남지 않자 얼씨구나 좋다고 치킨을 시켜 낮술도 먹고 야밤엔 라면 끓여 반주도 했다.
이렇게 음풍농월하며 긴 연휴를 다 보내고 나니 어느덧 원고 마감이 코앞에 들이닥쳤다. 그렇게 원없이 먹고 마시고 쉬었는데 일할 맛이 안 나면 인간도 아니지 싶어 도서관에 나와 앉아 글을 쓰다보니 지난 추석에 먹은 고소한 갈치구이 맛이 아련히 떠오른다. 입가에 웃음기가 돌고 명절이 이래서 좋은 거구나 싶다. 태곳적 조상들이 명절을 기리고 기다렸던 이유도 이렇게 휴식과 충전, 감사와 즐김의 시간이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런 참뜻을 잊은 지 오래인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명절의 참뜻은 소수 콩가루들의 삶 속에서만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설날은 언제 오나, 콩가루는 간절히 그때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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