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들에게 ‘안주 일체’는 메뉴의 진리다. 한겨레 박미향 기자
지난해 소설집 를 내고 인터뷰나 낭독회 등에서 틈만 나면 술 얘기를 하고 다녔더니 주변 지인들이 작가가 자꾸 그런 이미지로만 굳어지면 좋을 게 없다고 충고했다. 나도 정신 차리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앞으로 당분간은 술이 한 방울도 안 나오는 소설을 쓰겠다고 술김에 다짐했다. 그래서 그다음 소설을 쓰며 고생을 바가지로 했다.
A와 B가 만나 자연스럽게 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시며 대화하는 내용을 쓰다 화들짝 놀라 삭제 키를 누르거나 통째로 들어내는 일이 잦다보니 글의 흐름이 끊기고 진도가 안 나가 슬럼프에 빠졌다. 모국어를 잃은 작가의 심정이 이럴까 싶을 정도였다. 다시 나의 모국어인 ‘술국어’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느꼈지만 허벅지를 찌르며 참았다. 그 결과 주인공이 술집에 들어가긴 했으나 밥만 먹고 나오는 장면으로 소설을 마감하는 데 가까스로 성공했다. 그러자니 얼마나 복장이 터지고 술 얘기가 쓰고 싶었겠는가.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다 이 지면을 빌려 음식 얘기를 쓰게 되니 마음이 아주 환하다. 빛을 되찾는다는 ‘광복’(光復)의 감격을 알겠다. 드디어 대놓고 술 얘기를 마음껏 쓸 기회를 잡았구나 싶다. “여기는 음식 관련 코너인데 웬 술?”이란 반문은 내게 무의미하다.
오래전 TV 개그 코너 중에 ‘북청 물장수’가 있었다. 물통에 물을 담아다 파는 북청 물장수는 까막눈이라 글도 못 읽고 숫자도 모른다. 1+2가 얼마냐는 간단한 문제에도 화내며 고개만 내젓는데 신기하게도 숫자 뒤에 ‘통’이 붙거나 글자 뒤에 ‘냥’이 붙으면 사정이 달라져, ‘221통+178통’이라든가 ‘일흔닷 냥+서른두 냥’ 같은 어려운 문제도 “가만있자” 하고 팔을 붙이며 달려들어 눈을 희번덕거린 다음 대번에 맞춘다. 거기서 ‘통’과 ‘냥’을 지우면 또 못 맞히고 못 배운 자격지심에 화를 벌컥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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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꾼이 딱 그렇다. 세상에 맛없는 음식은 많아도 맛없는 안주는 없다. 음식 뒤에 ‘안주’ 자만 붙으면 못 먹을 게 없다. 어릴 때 입이 짧았던 나는 술을 마시며 입맛을 무럭무럭 키워왔는데, 흉물스럽기 그지없는 돼지비계나 막창이 극강의 안주로 거듭나는 데는 차고 쌉쌀한 소주 한잔이면 충분했다. 삭힌 홍어 또한 술이 아니었다면 평생 못 배웠을 음식이다. 한때는 그 맛에 중독돼 홍어집을 찾아다니느라 ‘홍어복’을 따로 마련하기도 했는데, 냄새가 배지 않게 비닐 코팅된 재질에 모자가 달린 긴 코트였다. 그런데 나는 막걸리에 홍어삼합도 좋아하지만 소주에 뜨끈한 홍어찜과 펄펄 끓는 홍어탕도 즐기는 탓에 지독한 김이 머리카락뿐 아니라 눈썹까지 올올이 배어 홍어복이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맛난 홍어도 술 없이 먹으라 하면 화가 벌컥 난다. 차라리 먹지 않는 편이 낫다. 북청 물장수의 숫자 관념이 ‘통’과 ‘냥’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듯, 술꾼의 미각도 안주 아닌 음식에는 작동하지 않는다. 술꾼은 모든 음식을 안주로 일체화한다. 그래서 말인데 옛날 허름한 술집 문이나 벽에 붙어 있던 ‘안주 일체’라는 손글씨는 이 땅의 주정뱅이들에게 그 얼마나 간결한 진리의 메뉴였던가.
내게도 모든 음식은 안주이니, 그 무의식은 심지어 책 제목에도 반영되어 를 줄이면 ‘안주’가 되는 수준이다. 이 코너 제목인 ‘오늘 뭐 먹지?’에도 당연히 안주란 말이 생략되어 있다. ‘오늘 안주 뭐 먹지?’ 고작 두 글자 첨가했을 뿐인데 문장에 생기가 돌고 윤기가 흐르고 훅 치고 들어오는 힘이 느껴지지 않는가. 나도 이 지면에 고작 두 번밖에 글을 쓰지 않았지만 지인들은 벌써 내가 술안주 얘기만 주야장천 쓰리라고 걱정들이 태산이다. 마음껏 걱정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무엇을 걱정하든 그 이상을 쓰는 게 내 목표다. 아, 다음 안주는 뭐 쓰지?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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