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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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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케 덤은 누가 먹었을까

아버지 월급날만 맛보던 서울 오복당 빵집 명물 ‘고로케’…

부산 구덕산 냄비국수와 우열 가리기 힘들어
등록 2017-09-06 02:34 수정 2020-05-03 04:28
바삭하고 쫄깃한 고로케는 어린 내 입맛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오군수제고로케

바삭하고 쫄깃한 고로케는 어린 내 입맛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오군수제고로케

지난회(<font color="#C21A1A">제1175호</font>)에 썼던 부산 구덕산 아래 국숫집 냄비국수를 내가 더 이상 못 먹게 된 것은 9살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우리가 부산에 살았던 이유는 아버지가 근무하는 일본 선박회사에서 휴가를 받은 선원에게 배편만 제공했기 때문이다. 열 달 동안 대양을 떠돌다 두 달의 휴가를 받아 일본 본사로 귀환한 아버지가 곧바로 배를 타고 당도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항구도시가 부산이었다. 그런데 내가 9살 되던 해부터 회사에서 배뿐 아니라 비행기편도 제공하면서 우리는 굳이 부산에 살 필요가 없어졌다. 어머니는 딸 셋을 이끌고 시댁 식구를 찾아다니며 아이들 교육을 위해 부득이 서울로 이사 가게 되었다고 겉으로는 침통한 얼굴로 작별인사를 고했지만, 시댁의 본거지인 부산을 떠나 친정의 본거지인 서울로 가게 되어 속으로는 환호작약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애틋한 냄비국수와 영영 작별했는데, 대신 서울로 올라온 뒤 한 달에 한 번 정도 외식에 육박하는 새로운 별식을 맛보게 되었다. 그건 오로지 아버지의 월급이 달러로 지급된 덕분이었다. 지정 은행에서 달러를 환율에 맞춰 한화로 바꾸어주면 어머니가 그 돈을 수령하는 방식이었는데, 당시 모든 동네에 모든 은행의 지점이 있지는 않았으므로 어머니는 매달 월급을 타기 위해 버스로 대여섯 정거장 되는 곳에 있는 지정 은행까지 가야 했다. 어느 날 월급을 탄 어머니가 소매치기를 경계하며 전전긍긍 버스를 기다리는 중에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근처에 ‘오복당’이라는 빵집이 있었는데 그때 마침 빵집 주인이 막 튀겨낸 ‘고로케’(크로켓이라 하지 않겠다)를 쟁반에 벌여놓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어머니는 월급도 탔겠다, 배도 고프고 딸들 생각도 난 김에 결코 가격이 만만치 않은 고로케를 무려 4개나 포장해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고로케가 식지 않도록 서둘러 돌아왔고 세 딸은 아직 온기가 남은 고로케를 하나씩 배당받았다. 냄비국수처럼 각자 몫이 똑 떨어지는, 마름모꼴 기름종이에 싼 고로케를 받아들고 나는 또 한 번 감격에 젖었다.

얄팍하고 바삭하고 쫄깃한 튀김옷 속에 볶은 채소와 다진 소시지, 삶은 달걀 등이 촉촉한 상태로 가득 들어 있었다. 당시 내 어린 입맛에 제일 맛있는 음식 1위는 통닭, 2위는 마른오징어튀김, 3위는 만두였는데, 고로케를 처음 먹어본 나는 대번에 만두를 4위로 밀어내고 고로케를 3위에 등극시켰다. 어머니도 고로케 맛에 중독됐는지 그 뒤 매달 월급을 타러 가면 오복당에서 따끈한 고로케를 4개씩 포장해 왔다. 처음에 오복당 주인은 정확히 한 달에 한 번씩 와서 고로케를 4개씩 포장해가는 어머니의 규칙성에 놀랐고, 다음엔 그런 어머니가 두 달째 오지 않는 것에 더 놀랐다. 그 두 달은 아버지가 휴가를 나온 때라 월급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두 달간의 휴가를 끝내고 바다로 떠난 뒤 어머니가 다시 월급을 타러 그곳 은행에 갔다 오복당에 들르자 빵집 주인은 그동안 어머니가 오지 않아 죽은 줄 알았다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반기더니 고로케 하나를 덤으로 주었다고 했다. 물론 그 뒤로는 덤을 주지 않았다. 그때 그 유일무이한 덤을 누가 먹었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나는 아닌데.

아무튼 나는 도저히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부산에 살 때처럼 1년에 한두 번 구덕산 냄비국수를 먹는 쪽과 서울로 이사 와서 1년에 열 번 오복당 고로케를 먹는 쪽 중 어느 것이 더 좋은지. 어떤 결정을 하든 당장 내 입에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주문을 재촉하는 직원 앞에 선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아 어떡하지, 둘 중에 뭐 먹지, 목하 고민 중이다.

권여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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