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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다, 간짜장에게

게걸스레 먹던 나, 들통난 신분, 그래도 다시 간다
등록 2017-12-12 14:57 수정 2020-05-03 04:28
술 마신 다음날 간짜장으로 속을 달랜다. 한겨레

술 마신 다음날 간짜장으로 속을 달랜다. 한겨레

오래전부터 단골로 가는 중국집이 있다. 원래 짜장면을 좋아하지 않아 어딜 가도 짬뽕을 시키는 내가 그 집에만 가면 간짜장을 시켜 먹는다. 그 집은 팔보채도 맛있다. 그래서 언니와 나, 남자친구 이렇게 셋이 가면 팔보채 중자를 시키고 간짜장 2인분을 세 그릇으로 나눠 달라고 해서 먹으면 딱 맞는다. 간짜장을 맛있게 먹으려고 나는 팔보채를 덜 먹는 자제심까지 발휘한다.

어느 날은 한밤중에 자다 깨서 내일은 그 집 간짜장을 먹으러 가야지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다시 잠들기도 한다. 심지어 술 마신 다음날도 그 집 간짜장이 간절히 먹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면 무조건 간다. 작취미성에 봉두난발을 하고라도 간다. 워낙 오랜 단골이라 우리가 가면 카운터의 여자 매니저와 홀을 관리하는 남자 매니저가 반갑게 맞아준다. 주문을 받는 직원마저 우리가 뭐라기도 전에 “팔보채 중자에 간짜장 둘을 셋으로요?” 하고 아는 척을 해서 “아니 오늘은 탕수육으로” “오늘은 깐풍기로” 하고 메뉴를 변경하기가 미안할 지경이다. 요리 메뉴는 가끔 바뀌지만 간짜장 둘을 셋으로 나누는 코스는 불변이다.

어느 날인가도 팔보채에 간짜장을 나눠 먹고 나오면서 늘 그렇듯 정규직인 언니가 계산을 했다. 언니와 카운터의 여자 매니저가 계산할 동안 나는 뒤편에서 냅킨으로 짜장이 묻은 입을 쓱쓱 닦고 있었는데 언니가 갑자기 나를 돌아보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여선아, 네 독자시래.” 나는 입을 닦던 동작을 멈추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며칠 감지 않은 머리와 화장은커녕 세수도 안 한 얼굴에 허름한 차림, 슬리퍼에, 안 봐도 내 꼴이 머릿속에 쫙 스캔됐다. 잠시 뒤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저, 저, 절 어떻게 알아보셨어요?”였다.

내 경악에 관계없이 여자 매니저는 어느새 내 책을 꺼내들고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래전부터 팬이었다, 혹시 아는 척하면 불편해하실까봐 안 하고 있었는데 이번 책이 너무 좋아서 읽다가 눈물이 났다, 그래서 사인을 받고 싶다. 이런 내용이었는데 그 얘기를 듣는 동안 나는 감동이 물밀듯 들어오기보다 부끄럽고 당황해 눈물이 났다. 오래전부터라니. 나는 오래전부터 지금의 꼴보다 더 안 좋은 꼴로 오직 간짜장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그 집에 온 적이 부지기수였고 팔보채의 전복 개수가 모자란다고 따진 적도 있고 간짜장이 빨리 안 나와서 직원을 닦달한 적도 있고 술을 먹고 큰소리로 떠들어댄 적도 있고, 또… 아, 그만하자. 나는 입을 닦던 더러운 냅킨을 왼손에 꼭 움켜쥐고 떨리는 오른손으로 그가 내민 펜을 받아 첫 장에 사인을 했다. 왼쪽 표지 날개에 붙은 내 사진을 보니 더욱 의아했다.

그 뒤 번민이 깊었다. 간짜장은 먹고 싶은데 이 꼴로 그 집에 가도 될까. 이미 보일 꼴 못 보일 꼴 다 보인 판국에 새삼스레 무슨? 이제라도 알았으니 내 오랜 팬에 대한 예의로다…, 뭐라고? 작가가 글이나 잘 쓰면 되지 무슨 돼먹지 않은 외모로 팬서비스 할 일 있나? 그렇지, 글을 잘 쓰려면 잘 먹어야 하고 그러려면 간짜장도 먹어야 하고…. 아니다, 아니야! 이 꼴로는 차마 못 간다. 다시 검열이 작동하고. 그래서 언니와 남자친구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한동안 그 집엘 못 갔다.

요즘은 다시 간다. 간짜장의 완승이다. 그나마 팬을 의식하고 좀 덜 추하게 먹으려 해도 간짜장은 입가에 소스를 묻혀가며 면을 쭉쭉 빨아들여 먹는 게 제일 맛있으니 어쩔 수 없다. 이젠 제법 넉살이 좋아져 눈도 못 마주치던 여자 매니저에게 잘 먹었다는 인사도 하고, 포스트잇이나 펜을 선물로 주면 고맙게 받기도 한다. 그래도 간짜장을 먹으러 갈 땐 좀 긴장된다.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는 빗고 간다. 유명해진다는 건 이렇게도 불편한 일이다. 그래서 더 유명해지기 전에 ‘오늘 뭐 먹지?’ 코너를 그만 쓰려 한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이제 각자 고민하시라, 오늘 뭐 먹을지는.

권여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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