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 얼굴을 잘 못 알아보고 이름도 못 외워 종종 오해를 산다. 거기다 술까지 퍼마시니 술 먹고 튼 관계는 술 깨고 깜깜하다. 한 젊은 시인은 내게 세 번째로 자기소개를 하고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화를 냈고, 어떤 소설가는 내가 이름을 묻자 기가 막힌 얼굴로 자리를 떴다. 그래서 나는 누가 먼저 인사하면 이름을 묻거나 정체를 밝히기 요구하지 않고 무턱대고 알은체를 하며 뭉개는 수법을 쓴다. 그러면서 호시탐탐 상대의 정보를 모으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상대의 이름을 부르면 쾌재를 부른다.
예전에 서울시청 앞에서 낯익은 중년 남성을 만났다. 얼굴까지 익은 정도면 보통 자주 만난 사이가 아닐 테니 자칫 이름을 물어보면 큰일이 날 판이었다. 그쪽에서도 나를 알아보고 인사하며 무슨 일로 나오셨냐고 묻기에 약속이 있다고 했다. 예의상 그에게도 무슨 일로 나오셨느냐 물었더니 “제가 취직을 했습니다” 했다. “그러시군요, 잘됐네요” 하고 헤어졌는데, 이름은커녕 그가 시인인지 소설가인지 평론가인지도 알 수 없었다. 취직을 했다니 근처겠지 싶어, 시청 근처에 있는 출판사·신문사·대학 등을 쭉 꿰보다 지쳐 포기하려는 순간 갑자기 생각이 났다. 생각난 순간 입에 침이 고였다.
우리 동네에는 오래된 전통시장이 있는데 이름도 하필 ‘남성시장’이다. 시장길 양옆으로 지네발처럼 가게들이 뻗어나가 규모가 제법 크다. 내가 가는 단골집은 채소·과일·생선·정육 등 품목별로 정해져 있는데, 시청 앞에서 만난 중년 남성은 내가 단골로 어묵을 사먹는 작은 분식집의 주인 남자였다. 처음엔 부부가 하다 언제부턴가 남자가 보이지 않아 물었더니, 여자가 자랑스럽게 남편이 취직했다고 말한 걸 들은 기억이 났다. 이쯤 되면 내 기억력이 아직 살아 있다고 기뻐해야 할지 죽어간다고 슬퍼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아무튼 나는 우리 동네 남성시장을 사랑한다. 그 분식집만 해도 튀기지 않은 찐어묵을 파는데, 어묵이 얼마나 담백하고 쫄깃한지, 국물이 얼마나 깨끗하고 시원한지 모른다. 해장으로 꼬불이 어묵 한 꼬치에 국물 두 컵을 마시면 속이 든든하고 술이 다 깬다. 분식집 부부로 말하자면, 처음엔 내 단골 채소가게 옆에 있던 중국산 바퀴벌레약 파는 좌판 자리에 어묵 리어카 하나만 놓고 시작해, 이제는 그 옆 나물 좌판까지 접수하며 어엿이 가게 모양을 갖춘 입지전적 인물들이다. 그래서 나는 어묵을 먹으면서 바로 옆 채소가게에 대파나 버섯 등을 주문할 수 있다.
채소가게도 굉장히 잘되는 집인데, 주로 장사하는 사람은 주인 여자와 알바 여자다. 주인 남자는 종종 술에 취해 잔돈을 잘못 거슬러 주거나 무를 밟고 넘어지거나 해서 주인 여자에게 구박을 받고 어딘가로 사라지곤 한다. 그도 다음날 어묵 국물로 해장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주인 여자는 알바 여자도 자주 구박하는데 너무 손이 커서 덤을 많이 준다는 게 이유다. 바로 그 이유로 나는 그 집 단골인데, 이를테면 네 묶음에 1천원인 깻잎을 내가 2천원어치 달라고 하면 알바 여자는 “어머, 하나가 더 딸려가네” 하며 아홉 묶음을 담고, 나는 “아이, 착한 깻잎이네” 화답하고, 주인 여자는 밉지 않게 눈을 흘긴다.
어느 날인가도 어묵을 먹으면서 채소를 주문했다. 어묵 국물을 충분히 먹고 채소를 받아 집으로 가는데 뭔가 기분이 영 개운하지 않았다. 집에 가서야 내가 어묵만 먹고 채소만 받고 아무에게도 돈을 내지 않고 왔다는 걸 알았다. 곧바로 돈을 치르러 갔더니, 분식집 여자는 “그냥 서비스로 드셔도 되는데” 하며 웃고, 채소가게 알바 여자는 “어머, 난 받은 거 같은데” 해서 주인 여자의 어김없는 눈 흘김을 받고, 나는 내 정신머리가 그나마 붙어 있는지 나가는 중인지 모르겠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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