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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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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누가 밀정이었나

블라디보스토크에 당도한 ‘간도 15만원 사건’ 주역들

무기 계약 뒤 인수 전날 일본 헌병이 급습하는데…
등록 2017-09-21 15:36 수정 2020-05-02 19:28
‘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역들인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왼쪽부터). 임경석 제공

‘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역들인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왼쪽부터). 임경석 제공

(제1177호에서 계속) 배는 8시간을 달렸다. 1920년 1월9일 밤 9시 포시에트 항구를 떠난 기선은 이튿날 새벽 5시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닿았다. 어둠 속에 도시가 빛났다. 일곱 가지 색깔로 꾸민 조명이 높은 산을 꾸미고 있었다. 찬란했다. 밤하늘의 별인지 전깃불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을 정도다. 최봉설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감탄했다. 항만시설이 잘 갖춰진 금각만(金角灣)에 접어들면서 배는 길게 뱃고동을 울렸다.

일행은 어둠이 깔린 항구에 발을 내디뎠다.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 한상호 등 ‘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역이 마침내 목적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그들은 안도감을 느꼈다. 일본 간도총영사관과 중국 지방관청 경찰대의 급박한 추격을 벗어났으니 말이다. 사지를 벗어난 셈이었다. 그러나 이곳도 100% 안전하지는 않았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이다.

신한촌서 열린 철혈광복단 비밀회의

1년4개월 전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이 연해주에 간섭군을 파견했다. 러시아혁명의 파급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1918년 8월이었다. 일본·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이 제각기 연해주로 군대를 보냈다. 그들은 러시아 극동 지역의 내전에 결코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 백위파 장군들을 일방적으로 지원했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나라는 일본이었다. 가장 많은 군대를 가장 오랫동안 러시아 극동 지역에 주둔시켰다. 출병 3개월 만에 러시아 극동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 수는 7만3천 명을 헤아렸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일본 파견군의 중심지였다. 파견군 총사령부와 헌병대가 주둔해 있었다. 그뿐인가. 일본 총영사관이 있었다. 이 기관은 반일 조선인의 동향을 추적하는 비밀경찰 역할을 했다. 그 때문에 스파이가 많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 밀집 거주지에는 일본 총영사관에 고용된 밀정들이 은밀히 활동하고 있었다.

일행은 신한촌에 숨어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 7개 조선인 거주지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당시 통계에 의하면 거류 조선인의 80%가 모여 살고 인구는 6500명이었다. 네 사람은 제각기 다른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위험을 분산하려는 취지였다. 불행히 누군가 발각된다 하더라도, 남은 이들이 사명을 다하려는 의도였다. 최봉설은 채성하(40·蔡成河)가 경영하는 여관에 숙소를 잡았다. 주인 채씨는 반일 의식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마음이 놓였다.

이튿날 밤, 비밀리에 철혈광복단 간부회의가 열렸다. 단장 전일(31·全一)이 소집한 회의였다. 1914년 북간도 용정에서 창립될 때부터 비밀결사를 이끌던 믿음직한 맏형이었다. 이 자리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 중인 주요 단원들이 모였다. 새로 획득한 군자금 15만원의 사용처와 책임자를 정하는 것이 주요 의안이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자금 사용처를 셋으로 정했다. 첫째 무기를 구매하고, 둘째 연해주 동부 산악지대인 수청에 사관학교를 건립하며, 셋째 신한촌 내부에 신문 발간과 도서 출판을 위한 사무소 건물을 구매하기로 했다.

결정 사항은 즉시 행동에 옮겨졌다. 장기영(40 전후·張基永)과 채영(29·蔡英) 등이 사관학교 부지를 물색하기 위해 수청으로 길을 떠났다. 5만루블을 휴대했다. 일본돈으로 치면 1만원이었다. 오늘날 화폐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약 10억원이다. 서류상 거래 당사자로는 합법적 신분의 사람을 내세웠다. 대동상회 대표 유찬희(柳讚熙)의 명의를 사용했다.

신한촌에 사무소 건물을 구입하는 문제도 실행에 옮겨졌다. 하바롭스카야 거리 9번지 건물이 물망에 올랐다.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백산학교 자리였다. 교사 4명에 학생 70명인 작은 학교였다. 그 건물이 일본돈 5천엔에 매물로 나왔다. 요즘 화폐 구매력으로 5억원에 상당한 돈이었다. 그것을 샀다. 신한촌 유력자이자 반일 민족주의자인 강양오(45·姜良五)와 조장원(36·趙璋元) 두 사람의 공동 명의로 매입 계약서를 작성했다.

1천 명 규모 독립군 편성할 무기 계약

무기 구입은 전적으로 ‘15만원 사건’ 주역들에게 위임됐다. 네 사람은 업무를 나눴다. 윤준희가 자금과 서류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나이가 가장 많고 ‘15만원 사건’의 입안과 집행을 이끌어왔던 터라 당연한 귀결이었다. 구매는 몸집이 크고 체력이 강대한 임국정이 맡았다. 그는 1년 전 권총 구입차 신한촌에 출입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5년 전 독립군 나자구(羅子溝)사관학교 경비 조달을 위해 그 학교 사관생도 40여 명과 함께 저 머나먼 우랄산맥 삼림지대에서 벌목노동에 종사했다.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그즈음 분산 유숙 대신 단체로 합숙하자는 논의가 나왔다. 김하석(40·金河錫)이 제안했다. 중책을 원활히 수행하려면 자주 회의를 열어야 하기 때문에 한집에 모여 지내자는 뜻이었다. 일리가 있었다. 게다가 김하석은 일찍이 간도 광성중학교 교사를 지냈기 때문에 철혈광복단 단원들에게서 선생님 소리를 듣는 이였다. 또 대한국민의회 군무부장으로 재임 중인지라 그의 발언은 존중됐다. 유사시에 일망타진될 위험이 상존했지만, 네 사람은 그 말을 좇기로 했다.

새로 옮긴 합숙소에서 무기 구매를 위한 논의가 급진전됐다. 임국정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무기 밀거래 파트너는 블라디보스토크 요새사령부 포병부 무기고 책임자 몰린 대위였다. 백위파 연해주 지방정부 포병 장교였다. 그를 통해 개인 화기는 물론이고 공용 화기도 구입할 수 있었다. 이 은밀한 거래를 주선한 중개인이 있었다. 엄인섭(44·嚴仁燮)이었다.

그를 믿을 수 있느냐는 반문이 나왔다. 임국정은 주저 없이 신뢰한다고 답했다. 엄인섭은 1908년 여름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한 연해주 의병의 중견 지도자였다. 우영장 안중근과 함께 좌영장으로서 의병부대를 지휘한 이였다. 임국정 자신과 개인적 인연도 남달랐다. 우랄산맥에서 벌목노동을 마치고 돌아올 때 그와 함께 의형제 결의까지 한 사이였다. 외국어 능력이 출중했다. 연해주에서 성장한 만큼 러시아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했다. 무기 밀매 같은 은밀한 일을 추진하려면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임국정은 아무 걱정 말라고 동료들을 안심시켰다.

다행히 무기 구매 계약은 잘 진행됐다. 비밀 담판에 나갔던 임국정이 사흘 만에 되돌아와 밝은 얼굴로 보고했다. 소총 1천 자루, 탄약 100상자, 기관총 10문을 좋은 시세에 거래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이었다. 도합 3만2천여원에 해당하는 무기였다. 오늘날로 치면 32억원어치였다. 1월30일 착수금 5만루블(일본돈 1만엔)을 건네고, 이튿날 31일 밤 러시아 군용 자동차에 약속된 분량의 무기를 적재하며, 곧바로 얼어붙은 아무르만을 건너 바라바시 북쪽에 위치한 이도구(二道溝) 방향으로 수송하겠다고 약속했다. 청년들은 기쁨과 함께 긴장감을 느꼈다. 얼마나 간절히 바라던 무기인가. 단숨에 1천 명 규모의 대단위 독립군을 편성할 수 있는 장비였다.

그날 저녁, 김하석 군무부장이 찾아왔다. 뜻밖의 요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권총과 수류탄을 빌려달라고 했다. 현지 청년들이 일본군 병영 내부에 철병을 촉구하는 선전 삐라를 살포할 예정인데, 거사 당일에 호신용 무기를 갖기 희망한다고 했다. 달리 구할 곳이 없으니 하루이틀만 빌려달라는 말이었다. 반발이 있었지만 임국정이 승낙했다. 동료들은 그 판단을 존중했다. 책임자 윤준희를 제외한 다른 세 사람의 권총과 수류탄은 김하석에게 인계됐다.

밀정 통해 동향 파악하던 일본 경찰
적은 항상 우리 안에 있었다. 영화 <밀정>처럼 ‘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역들도 거사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일본 경찰이 심어둔 밀정 때문에 좌절을 겪는다. <밀정>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제공

적은 항상 우리 안에 있었다. 영화 <밀정>처럼 ‘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역들도 거사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일본 경찰이 심어둔 밀정 때문에 좌절을 겪는다. <밀정>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제공

합숙소 위치는 하바롭스카야 거리 5번지였다. 집주인 임씨는 조선시대 종9품 말단 관리인 ‘참봉’이라고 불리는 이였다. 부엌과 안방 사이에 벽을 두지 않고 부뚜막에 방바닥을 잇달아 꾸민 함경도식 가옥이었다. 그 공간을 정주간이라고 불렀다. 안쪽으로 방이 여럿 있는데, 한가운데 방을 청년들이 사용했다. 그 방에는 윤준희가 관리하는, 거액의 지폐와 기밀문서를 넣은 철제 상자도 보관돼 있었다.

1월30일 밤이었다. 내일 저녁에 있을 대규모 무기 인수를 앞두고 청년들은 들떠 있었다. 최봉설과 한상호는 알고 지내는 사이인 지영감네 집을 방문해 즐겁게 놀았다. 술도 마시고 국수도 먹으며 밤이 깊도록 놀았다. 자고 가라는 주인의 친절한 권유를 사양하고 합숙소에 돌아왔다. 밤 11시쯤이었다. 북간도 용정 청년 나일(羅一)이 와 있었다. 반일 혁명 의식이 강렬하지만 ‘15만원 사건’과 관계없는 사람이었다. 무람없이 신뢰하는 사이였으므로 그날 밤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밤 12시쯤 다섯 청년은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잠이 들었다.

새벽 3시였다. 일본군 헌병대 1개 소대 병력이 임 참봉 집을 에워쌌다. 밀정의 길 안내를 받았기 때문에 명확히 표적할 수 있었다. 러시아인 경찰관 2명도 대동했다. 외교 문제를 고려해 사전에 연해주 경찰 당국과 교섭한 결과였다. ‘살인강도범’이 신한촌에 잠복해 있음을 탐지했으므로 범인 체포 과정에 입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게 받아들여졌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비로소 헌병대 병력을 출동시켰다.

고등경찰 기토 가쓰미가 이 과정을 지휘했다. 그는 ‘외무성 촉탁 조선총독부 통역관’ 직함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 파견된 경찰 간부였다. 조선 강점 뒤 10여 년 동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붙박이로 근무 중이었다. 밀정을 통해 ‘범인’ 동향을 낱낱이 들여다보던 그는 마침내 디데이를 잡았다. 체포 작전에 돌입했다. 많은 예산을 들여 오랜 기간 스파이를 양성해온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출입문에서 네 번째 자리에 누웠던 최봉설은 잠결에 대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정주간에서 임 참봉이 누구냐고 물었다. 조선말로 답하는 게 들렸다. “일본 헌병대에서 왔으니 문을 벗기시오!” 화들짝 잠이 깬 최봉설은 동료들을 서둘러 깨웠다. 그새 일본군이 들이닥쳤다. 방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총부리와 손전등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한 사람당 헌병 3명이 달라붙었다. 하나는 총을 겨누고 다른 둘은 오랏줄을 들고서 결박하기 시작했다. 둘째 열에 누운 윤준희만이 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완강히 저항하며 권총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자던 중에 예기치 않은 기습으로 당황해서인지 금방 제압되고 말았다.

최봉설에게도 세 사람이 달려들었다. 그는 결심했다. 나 혼자서라도 마지막 힘을 다 써야 하겠다고. 그새 헌병들은 상황이 종료됐다는 듯 긴장감이 다소 풀려 있었다. 그는 앞으로 다가오는 두 헌병의 콧등을 주먹으로 가격하고 그 옆에 선 군인의 급소를 발길질했다. 문 앞에 서 있는 총 든 군인은 박치기로 넘어뜨렸다. 빠르기가 비호같았다.

홀로 가까스로 탈출해 도주한 최봉설

복도로 나갔다. 정주간에 대기하던 헌병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팔을 잡은 놈, 목덜미를 붙잡은 놈, 등짝 옷 덜미를 쥔 놈 등 제각각이었다. 최봉설은 뛰어나가던 기세에 더욱 힘을 가해 몸을 내뺐다. 그바람에 어설프게 신체 한 부분씩을 쥐고 있던 군인들이 구들 위로 나자빠졌다.

그는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좋아했다. 학생 시절 간도 연합운동회 때 달리기 경주에서 매번 1등을 독차지했다. 그래서 ‘날아다니는 최봉설’이라고 일컬었을 정도다.

정주문을 나섰다. 총을 짚고서 무심히 서 있는 헌병 하나가 보였다. 그쪽 위치가 한두 계단 낮았다. 최봉설은 뛰면서 공중으로 몸을 날려 그자의 가슴팍을 찼다. 얼음판 위로 나자빠지는 헌병 모습이 보였다.

이제 마당이었다. 헌병이 여럿 모여 있었다. 마당 너머 큰길에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여러 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반대편 담장 쪽으로 몸을 날렸다. 판자를 잇대서 짠 나무담장이었다. 함경도 방언으로 ‘장재’라고 불렀다. 여러 집이 잇달아 자리잡은 탓에 반대편 골목으로 나가려면 여러 장재를 뛰어넘어야 했다. 얼추 헤아려도 열 개는 넘었다.

헌병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장재를 뛰어넘는 최봉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그는 이집 저집 장재를 무사히 뛰어넘었다. 하지만 마지막 장재를 넘을 때 오른쪽 팔에 총을 맞았다. 솜 넣은 내복을 입고 있었다. 총 맞은 곳에 불길이 일었다. 그는 눈 쌓인 밭에 드러누워 불을 껐다. 불은 껐지만 피가 흘렀고, 통증이 몰려왔다. 오른팔을 전혀 쓸 수 없었다.

간신히 포위망을 뚫었다. 이제는 추격을 따돌려야 했다. 산등성이에 비스듬히 자리잡은 신한촌 지형을 고려해 산 아래쪽으로 뛰었다. 아무르스카야 거리, 멜리니콥스카야 거리, 젤레즈노다로즈나야 거리를 차례로 횡단했다. 그 끝은 바다였다. 한겨울이라 바다가 얼어 있었다. 얼어붙은 아무르만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건너편 육지까지 거리는 16km였다. 40리 길이었다. 최봉설은 바다를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아무르만을 향해 뛰었다. 아무르만은 한겨울에 얼어붙기 때문에 으레 교통로로 사용되곤 했다. 사람과 말은 물론이고 자동차까지 건널 수 있었다.

1월 말 블라디보스토크의 겨울 온도는 영하 20∼30℃를 오르내렸다. 한밤중인데다 강한 바닷바람이 거침없이 불었다. 체감 온도는 더 낮았다. 잠자던 중 느닷없이 습격당했기 때문에 최봉설은 옷을 충분히 갖춰입을 수 없었다. 양말과 내복을 입었을 뿐이다.

그는 얼어붙은 바다 위를 뛰었다. 왼팔로 총 맞은 오른팔을 쥐고서 달렸다. 절반쯤 건넜을 때다. 아무르만 한가운데였다. 거기에 또 하나의 난관이 버티고 있었다. 바닷물이 얼지 않은 채 흘렀다. 절망감이 몰려왔다. 얼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퇴양난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다시 육지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신한촌에서 3km 떨어진 브타라야 레츠카 철도역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역전 큰 바위 밑에 도착했다. 어느덧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총상 입고 온몸이 얼어붙었는데 과연 어디로 가야 살 수 있을까?

달리 대안이 없었다. 그는 신한촌에 되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당도해 분산 유숙할 때 머물렀던 채성하의 여관을 떠올렸다. 더욱이 그 집에는 딸 채계복(蔡啓福)이 머물고 있었다. 서울 경신여학교에 유학하는 중 3·1운동에 참여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선 애국부인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채성하의 집은 아무르스카야 거리 22번지에 있었다. 피습당한 합숙소 임 참봉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최봉설은 살금살금 여관에 접근해 조심히 문을 두드렸다.

최봉설의 기대는 적중했다. 그는 채씨네 가족의 진심 어린 보호를 받았다. 운도 좋았다. 때마침 여관에 투숙 중이던 여의사 이혜근의 집도로 오른팔에 박힌 탄환을 빼냈다. 적절한 응급조치도 받았다. 여자들은 최봉설의 피 묻은 옷을 벗기고 얼어붙은 양말을 가위로 뜯어냈다. 온몸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칭칭 감았다. 하지만 최봉설의 상태는 심각했다. 눈과 입을 빼고 온몸이 얼어 있었다. 몸이 녹으면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신음하는 환자를 간호하며 채계복은 안타까워 흐느꼈다.

채성하는 지혜로운 이였다. 여관은 위험했다. 환자를 안전하고 믿을 만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는 가까운 곳에 개점한 아들 채창도의 가게를 선택했다. 가게 한쪽에 비밀 공간을 만들었다. 새로 벽지를 발라 밖에선 보이지 않도록 했다. 그곳에 환자를 은밀히 수용했다. 가족 중에선 오직 채계복만 드나들게 했다.

병상에 누운 최봉설은 자나 깨나 끌려간 동료들의 안위를 걱정했다. 악행에 얼마나 고생할지, 고문을 이겨낼 수 있을지, 말 못할 불행을 겪지나 않을지 근심이었다. 게다가 끝내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무엇이 잘못됐기에 헌병대의 습격을 받았을까? 도대체 누가 밀정이란 말인가? (다음회에 계속)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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