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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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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의 축적

등록 2017-07-13 17:36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새로운 일을 막 시작한 요즘, 첫 직장에서 있었던 일들이 자꾸 떠오른다. 처음 1~2년쯤 끊임없이 미팅에 끌려다녔다, 직종 특성상 유난히 미팅이 많았다. 팀 내부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미팅뿐 아니라 고객사 관계자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우리 생각을 설득하는 미팅, 내·외부 전문가들에게 정보와 의견을 구하는 미팅, 그런 미팅들을 준비하는 미팅. 신참인 나의 참석이 꼭 필요한 미팅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사들은 모든 미팅에 참석하게 했다. 미팅에 낮 시간 대부분을 보내고 저녁에야 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날이 많았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미팅이 적지 않았고, 의견을 말했더라도 첫 1~2년 동안 내 의견이 필요한 경우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때는 정말 미팅들에 ‘끌려다닌다’고 느꼈다.

불필요한 것 같았던

많은 시간이 흘렀고, 사회적·개인적으로 일하는 환경이 달라졌다. 지난 몇 년 조직에 속하지 않은 채 개인으로 일했고, 팀이 있어도 유연한 프로젝트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일하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나도 그들도 정말 많은 일을 혼자 처리하고 많은 미팅에 혼자 참석한다. 함께 일하는 팀이 있을 때도 비슷했다. 여럿이 미팅에 참석할 만큼 자원이 여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혼자 일할수록 불필요한 것 같았던 수많은 미팅 경험이 나중에 쓸 수 있는 총알처럼 내 안에 축적되었다고 느꼈다. 생소한 일을 할 때, 예상치 못한 역학관계가 펼쳐질 때,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한복판에 있을 때, 과거의 어떤 장면들이 떠올라 나를 이끌어주곤 한다. 성공적인 미팅과 엉망진창인 미팅, 하나 마나였던 미팅 사례들이 내게 어떤 식으로든 스며들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각양각색 상사와 일했고, 그들이 제각각 방식으로 상대를 설득하거나 정보를 얻어내려 하고, 그 시도에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아왔다. 그리고 이제 와 나를 ‘끌고다닌’ 그들에게도 수고였으며, 그들이 수고하게끔 이끈 조직의 의지가 있었다고 깨닫는다. 조직의 투자였고, 조직도 그 정도 투자할 수 있는 자원이 있었던 것이다. 업계의 좋은 시절이었다.

축적한 총알이 있더라도 일이 언제나 잘 풀리는 것은 아니다. 생소한 일을 붙들고 맨땅에 헤딩하며 이런저런 미팅에 홀로 얼굴을 드밀다보면, 절반쯤은 (그것도 운이 좋으면) 또 삽질했다는 자조에 빠지곤 한다. 삽질도 보아주는 이가 있다면 축적되는 경험이고 반면교사로나마 배움일 텐데, 홀로 하는 삽질은 삽질일 뿐이구나 싶어 더 허탈해진다. 모든 일이 뚜렷한 성과를 남길 수는 없다. 해보지 않은 일을 할 때면 더욱 그렇다. 나는 유연하고 자유롭게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미완이나 실패 속에 과정 중의 발견이나마 함께 나눌 이가 없다고 느낄 때, 깊이 외로움을 느낀다.

실패를 진화시키는 방법

오해를 피하기 위해 확실히 해두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가르침을 넘기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선배들을 보며 알게 모르게 배우는 경험을 칭송하려는 것도 아니다. 개인에게만 머물러 있으면 흩어지고 말 사건들이 함께 일하는 모두에게 자산으로 축적되는 방법을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먼저 시작한 사람은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 공과가 모두 담긴 일의 경로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실패가 개인적 시행착오에 머물지 않고 공동 자산으로 진화한다.

내가 경험한 배움과 축적의 방식이 여전히 유효한 곳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구성원 전부가 일의 프로세스를 가능한 한 날것 그대로 경험하고, 그 과정에서 암묵적으로 배움과 축적이 일어나게 하는 것은 비효율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비효율적이나마 작동하던 방식이 사라진 자리를 채울 새로운 방식을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경험들은 흩어지고, 한 명에겐 실패이지만 다음 사람에게는 디딤돌이 되는 일을 보기 어려워서 아쉽다. 그러나 내가 모르는 곳에서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경험을 공동 축적하고 배움을 교환하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나도 그 새로운 방식을 배우고 싶다.

제현주 일상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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