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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 대선

등록 2017-05-10 13:52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우리가 행진하고 행진할 때…” 그저 노래가 흘렀을 뿐이다. 딱히, 대단하게 슬픈 장면도 아니었다. “우리는 빵을 위해 싸우지만 장미를 위해 싸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만, 주디 콜린스의 청아한 목소리로 익숙했던 노래 (Bread and Roses)가 영화 속 배우들의 합창으로 이어지는 내내 흐느끼고 말았다. 노랫말처럼 요즘 “가슴도 몸만큼 허기지답니다”.

존엄의 상징, 장미

영화 에서 를 합창하는 장면은 유튜브를 통해 몇 번이고 다시 봐도 뭉클하다. 1984년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이 집권한 영국에선 탄광노동조합이 격렬한 파업에 나섰다. 마크와 친구들은 “광부들을 돕자”며 양동이에 돈을 모으는 운동을 펼친다. 그러나 어떤 노조도 그들의 후원금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마크와 친구들이 LGSM(Lesbian and Gay Support the Miners), 즉 광부를 지지하는 게이와 레즈비언이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LGSM은 웨일스의 작은 탄광마을과 인연을 맺는다. 하지만 탄압받는 광부와 가족들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는 성소수자들과 달리 보수적인 시골 주민들은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을 표출하며 마음을 활짝 열지 않는다.

가 마을회관에 울려퍼질 때, 성소수자들과 주민들의 ‘마음과 마음’이 통했다. 마크가 싸움에 지친 주민들을 독려하는 연설을 끝내자, 누군가 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성 주민들이 하나둘, 냉랭하던 남성 광부들까지 모두 벌떡 일어서서 아름다운 화음으로 를 합창한다. 나의 허기진 가슴까지 가득 차는 듯했다. 영화 속 대사처럼 “연대란 두 손을 맞잡는 것”이니까. 이 영화는 실화에 기반했다. 웨일스 주민들은 파업이 끝난 1985년 동성애 퍼레이드에 집단으로 참여한다. ‘게이와 레즈비언을 지지하는 광부들’이라는 커다란 플래카드를 들고서.

장미는 그저 아름다운 꽃이 아니다. 1911년 제임스 오펜하임이 쓴 시 ‘빵과 장미’에서나 191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직물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며 내건 ‘빵뿐만 아니라 장미를 원한다’는 슬로건에서나 ‘장미’는 인권이자 존엄의 상징이었다. 남성 노동자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여성 노동자가 정치적 주체로 일어서는 선언이었다. 지금도 ‘세계 여성의 날’에 장미꽃을 주고받고, 영국에서 노동자가 장미꽃을 가슴에 꽂고 투쟁하는 이유다.

‘장미 대선’이 끝난다. 5월9일, 꽃 피는 봄에 새로운 대통령이 뽑힌다. 총칼을 휘두르는 대신,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 잘못한 대통령을 끌어내린 민주주의의 새 역사에 ‘장미 대선’이란 향기로운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장미 대선이 허기진 가슴을 채워줄 만큼 자긍심(pride)과 존엄(dignity)으로 과연 충만했을까.

선거 내내 가슴은 허허로웠다. 에 나오는 1984~85년 영국의 현실이 2017년 한국에서 재현됐다. ‘탄광노조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대처를 닮고 싶다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강성 귀족노조를 때려잡겠다”고 공언했다. “동성애 때문에 에이즈가 창궐한다”는 거짓 공격을 일삼았다. 세월호 유가족, 성소수자, 비정규직, 부양의무제 폐지를 주장하는 빈곤층은 ‘존엄’은커녕 ‘인간에 대한 예의’조차 갖추지 못한 이들의 발길에 함부로 차였다.

붉은 장미 대신 흰 국화

장미 대선에 정작 ‘장미’는 없었다. ‘빵’도 없었다. 사드와 안보, 색깔론에 가려 불평등, 경제민주화, 복지 등 절박한 생존 이슈는 후순위로 밀려났다. 를 극장에서 보고 나오자마자 뉴스 속보를 접했다. 경남 거제 삼성중공업에서 크레인이 쓰러져 3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는 소식이었다. 숨진 6명은 모두 협력업체 소속 비정규직. 그날은 노동절인 5월1일. 정규직은 쉬는 날, 비정규직은 빵을 위해 일했다. 그들의 영정 사진 앞에는 붉은 장미 대신 흰 국화가 놓였다. 장미 대선은 끝났지만, 아직 장미꽃은 피지 않았다. “우리의 삶이 착취당하지 않기를… 빵과 장미를 함께 주세요.”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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