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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수'가 없는 세계

등록 2016-08-24 22:10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그런 순간을 나는 기다리지 않는다. 아예 그런 상상조차 잘 않고 산다. 단언컨대, 그런 순간이란 없다. 우리는 모두 실재를 사는 ‘오대수’다. 타협하고, 대충하고, 미루고, 도망가고, 합리화하고 그럼에도 끝내 자위하며 그저 그렇게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아갈 뿐이다. 어쩔 수 없지만, 창피할 것도 없다. 단지, 살아야 하는 것이니까. 그걸 뛰어넘는 경지와 지평에 대한 상상이란 건 대체로 오늘의 삶을 참을 수 없이 비루하게 만들 뿐이니까. 삶은 항상적인 것이지 완성적인 것이 될 수 없으니까. 그렇게 인생은 철저하게 상상선(imaginary line) 아래에서, 보통의 그저 그런 요소들이 범벅된 채 존재한다. 결핍은 매 순간 분명하고, 어떤 면에선 통째 부조화하기도 하지만 그런 구멍들에 적당히 익숙해진 채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누구나, 적당히 터득한다.

한 점 부끄럼 없는 순간

그런데 놀랍게도 4년마다 한 번씩은 그런 상상을 하게 된다. 신윤동욱 기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 너머의 세계’를 응시할 수 있는 기회다. 올림픽이다. 나는 분명 여기 소파에 편하게 누워 있다. 저 승부와 상관없는 사람이다. 대개의 종목들은 지난 4년간 관심조차 가져본 적 없다. 지금 뛰는 저 선수들 가운데 한쪽만이 철저히 나의 편인 이유 역시 단출하다. 가슴에 달려 있는 국기. 그 소속감이야 바꿀 수 없지만, 그걸 여전히 닳지 않는 저 영원의 손수건처럼 흔들어내는 해설의 객기가 조금 짜증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저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금세 도착한다. 희석됐다고 생각했을 뿐, 여전히 뜨듯한 뭉클함의 원형질과 마주한다. 매혹되는 순간 동일시된다. 나는 이미 너다. 나도 이미 거기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상황, 4년마다 반복되는 중언부언한 감정의 정체가 무엇일까, 줄곧 생각해왔다. 잘 모르지만 그 기원이 됨직한 어떤 장면들은 생각난다. 선동열이 오치아이를 3구 삼진으로 잡아낸 1991년 ‘한·일 슈퍼게임’이나, 그라운드 바깥에서 튀어나온 듯 골 에어리어로 돌진해 오른발 인사이드로 골대를 함락했던 1994년 미국 월드컵 서정원의 골 같은 것들. 10대 소년이 보기에 그건 실재가 아니었다. 변방의 미개한 북소리 정도로 존재하던 나의 국가가 저 거대한 세계를 기습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사건’은 스포츠에서만큼은 주기적으로 일어났다. 그렇게 일어날 수 없다고 믿었던 일의 발현에 중독된 채 소년은 어른이 됐다. 올림픽은 말하자면 그 도둑 같은 흥분을 스펙터클의 시스템으로 안착시킨 인류의 발명이다.

물론 이제 소년이 아닌 나는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편이 훨씬 낫고, 어떤 일들은 아무리 바란들 일어나지 않음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올림픽은 올림픽이다. 더 이상 우리 편이 이겨서는 아니다. 오히려 매력적인 것은 예정된 패배에도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절정의 도전들이다. 예컨대, 그렇게 계속 득점할 순 없음을 알면서도 또 떠올라야 했던 김연경(배구)의 점프는 초월적이었고, 그 “씨발”은 숙연했다. “나보다 땀을 많이 흘린 자, 금메달을 가져가도 좋다”고 단언했다지만,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겨우(!) 세 번째로 땀을 많이 흘린 사람에게 도전할 수밖에 없게 된 김현우(레슬링)의 저돌성은 너무 처연해 차라리 아팠다. 앳된 얼굴의 정영식(탁구)이 울 듯 울지 않으며 매치포인트에 넘어지지 않고 듀스를 끌어내고, 접전의 랠리 끝에 누워 포효할 때, 그의 등은 흥건히 행복해 보였다. 펜싱의 규칙을 아는 해설자는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침착의 현존을 보여주며 경기를 거머쥔 박상영이 펄쩍 뛰며 마스크를 벗어젖힐 때, 나는 그만 울어버렸다. 그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시공간을 제 몸으로 돌파해온 자만이 울부짖을 수 있는 순정한 포효였다.

당신 일상도 언젠가

소설가 김훈은 올림픽에 대한 단상을 쓰며 “올림픽은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의 갈망과 몸의 아름다움과 몸의 성취와 몸의 좌절을 보여주는 몸의 축제”라고 했다. 여기에 보태, 올림픽은 그런 질문일지 모른다. 도저히 실패를 멈출 수 없는 당신의 일상도 언젠가 전혀 뜻하지 않게 상상선을 넘어설 수 있지 않겠느냐는. 누군가 저기 넘어섰다는.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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