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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지기 전에 가보자 인디 공간

성소수자 서점, 독립영화 상영관, 패션 편집숍까지… 언제 문 닫을지 모르는 인디 공간 46곳 담은 <서울 인디 예술 공간>
등록 2016-07-15 17:40 수정 2020-05-03 04:28
정용일 기자

정용일 기자

막내  국물이 맛있네. 조미료 넣었당가?

엄마  뭔 소리데? 안 넣었제.

막내  신기하네이.

엄마  맛없으믄 쪼까 쓰긴 해야.

2007년 11월9일, 막내아들은 엄마의 ‘비밀’을 알아버렸다. 매운탕으로 보이는 간간한 국물에 담긴 큰 국자 사진이 증거로 남았다.

2006년 7월~2016년 5월 10년 동안 엄마와 막내아들이 나눈 짤막한 대화와 소소한 사진을 담은 는 “엄마의 시간이 영원히 50시면 좋겠”지만 “쑥스러워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막내아들이 “오롯이 엄마에게 드리는” 책이다. 글과 사진은 물론 책의 제작·인쇄 역시 막내아들인 직장인 정기웅씨가 스스로 해결했다.

해방촌에서 하루 보내는 방법

이토록 애틋한 막내아들의 고백이 담긴 책을 엄마뿐 아니라 우리도 읽을 수 있게 된 데는, 개인이 직접 만든 독립출판물을 전문으로 파는 독립출판서점 ‘스토리지 북 앤 필름’의 공이 컸다.

‘세상에 나오는 모든 것은 가치 있다’고 믿는 강영규씨가 운영하는 아담한 이 서점은 지난 6월 말 출간된 (스타일북스 펴냄)의 서울 용산구 ‘해방촌 편’에 두 번째로 등장하는 ‘인디 공간’이다.

“해가 맑은 날, 다닥다닥 붙은 오래된 서울 동네 집들 사이사이로 비추는 햇살을 받으며 해방촌오거리를 올라, ‘스토리지 북 앤 필름’에 들러 새로 입고된 독립출판물과 필름카메라를 구경한 뒤 ‘공간해방’에서 새로운 전시·행사를 관람한다. 그러고선 신흥시장 안으로 들어가 ‘아트 스페이스 ONE’에서 전시 관람을 한다. 옥상 영화 상영제가 있는 날 들르면 베리 굿이다!” 지난 7월6일 해방촌에서 만난 저자 조숙현씨가 알려준 해방촌의 인디 공간을 가장 완벽히 즐기는 ‘꿀팁’이다.

‘인디 예술 공간’은 ‘인디’(indie), ‘언더’(under) 문화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상업화에 동조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예술을 하는 자생적인 공간, 또는 그런 공간이 모인 마을(커뮤니티)을 뜻한다. 해방촌 외에 인디 문화 중심지였던 홍익대 앞, 옛 서울의 모습이 남아 있는 부암동, 기묘하고 이국적인 이태원·한남동, 예술가들이 새로 둥지를 튼 문래동 등 서울 10개 마을을 중심으로 모인 46곳의 인디 복합문화 공간이 에 소개됐다. 영화주간지 <film2.0>과 미술월간지 <public art>의 기자 출신으로 유독 인디 문화를 좋아하는 저자가 직접 발품을 팔아가며 한 곳씩 ‘수집한’ 공간들이다.
벼랑 끝에서 만든 내 공간

<서울 인디 예술 공간> 저자 조숙현씨는 “돈이나 세간의 관심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 몰두하는 사람과 그 공간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고 말했다. 정용일 기자

<서울 인디 예술 공간> 저자 조숙현씨는 “돈이나 세간의 관심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 몰두하는 사람과 그 공간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고 말했다. 정용일 기자

인디 공간들은 감각적이고 제멋대로이며 예측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웬만하면 당신이 상상하는 대로 다 이룰 수 있다. 간이침대에서 만화책을 보며 스르르 잠들었다가 해 질 무렵 일어나 테라스에서 석양주를 즐기고 싶다면 ‘청춘문화싸롱’, 사람을 그럴싸하게 그리고 싶은데 어쩔 줄 모르겠다면 ‘스튜디오 파이’, 최신 오락은 절대 없지만 조이스틱으로 스트리트파이터·갤러그의 참맛을 느끼고 싶다면 ‘옥인오락실’로 달려가면 된다.
여기서 끝이면 서운하다. 독립영화를 좋아하는 연인을 위해 영화관을 통째로 빌리고 싶다면 6개 좌석에 100인치 스크린을 갖춘 ‘극장판’, 모든 안주는 욕 나올 만할 때 나온다지만 요리 맛과 다양한 막걸리 컬렉션이 일품인 ‘산체스 막걸리’, 반전 있는 힙합 스타일과 언더그라운드 감성이 섞인 대중적 패션을 원한다면 ‘su;py’도 있다. 이렇게 ‘골라 즐기는’ 재미가 쏠쏠한 곳이 인디 공간이다.
그러나 독특하고 발랄한 공간엔 저마다의 우여곡절이 있다. 자신만의 표현을 포기할 수 없는 젊은 예술가나 문화기획자에겐 비주류의 인디 공간 말고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어요. 한국의 주류 문화 시스템에 들어가는 건 너무 어렵지만 막상 시스템에 들어가서도 관료적 분위기 때문에 마음대로 작업하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내 공간을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간 주인장들이 공통적으로 밝힌 ‘독립’ 배경이다.
고객의 요구에 맞춘 ‘영혼 없는 디자인’에 질려 ‘보부상회 디자인 협동조합’을 꾸린 건축·금속·시각 디자이너들, 신랑·신부만 바뀌는 웨딩사진이 지겨워 흑백필름 동네 사진관인 ‘연희동사진관’을 연 김규현씨 부부, “버틸 때까지 버텨볼 테니 일단은 하고 싶은 걸 하자”며 시집 위주의 ‘다시서점’을 운영하는 청년 시인 김경현씨 등 46곳의 공간에는 46개의 사연이 있다.
건물주만 좋은 일 했네
서울 용산구 해방촌 오거리에 있는 ‘아트스페이스 ONE ’은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이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 공간이다. 옥상에선 가끔 영화 상영회도 열린다. 조숙현 제공

서울 용산구 해방촌 오거리에 있는 ‘아트스페이스 ONE ’은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이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 공간이다. 옥상에선 가끔 영화 상영회도 열린다. 조숙현 제공


물론 인디 공간이 예술가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LGBT(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터) 콘텐츠를 모아놓은 ‘햇빛서점’ 운영자는 2년 전 게이 정체성을 깨달은 뒤 “밝은 낮에도 당당하게 문화를 즐겨보자”며 유쾌한 서점을 열었다. 올해 창간한 게이 전문 잡지 , 논란의 똥꼬부채 등이 운영자의 추천작이다.
외국계 대사관과 비정부기구(NGO)에서 환경 관련 일을 하는 직장인 이희송씨는 “숨차게 달려오다 문득 책방을 내고 싶어졌다”며 프랑스·벨기에 등 다양한 국가의 그래픽노블을 파는 ‘책방 피노키오’를 냈다. “그래도 단연 최고는 ‘심야오뎅’인데, 주인장의 복잡한 캐릭터가 인상적”이라고 조숙현씨는 말했다.
캄캄한 밤, 부암동의 구불구불한 산자락을 힘겹게 오르면 호롱불로 먼저 맞아주는 곳이 심야오뎅이다. 이곳 주인장 김슬옹씨는 의외로 젊은 플로리스트다. 체육대학에서 검도를 전공한 그는 상명하복 문화가 싫어 디자인으로 전공을 바꿨지만 디자인 회사 역시 못 견디게 답답했다. 플로리스트로 전업한 뒤에는 자취방을 개조해 만든 이 공간에서 낮이면 꽃을 만지고 밤이면 오뎅을 판다. 꽃꽂이만큼이나 섬세한 유부주머니가 들어 있는 오뎅탕과 금요일마다 열리는 밴드 ‘금주악단’의 공연이 인기다.
외로운 예술을 하는 젊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작업실 또는 가게를 열린 공간으로 가꾼다. 예술가와 비전공자 간의 교류, 예술 공간과 마을의 연결 문제에 대부분 관심이 많다. ‘어딘가 핀트 나간 사람, 엉뚱한 사람이 이용하는 공간’인 예술인 아지트 ‘초능력’을 운영하는 독립문화기획자 바이홍씨 역시 지역사회와 예술의 상생을 도모해왔다. 한남동 일대에서 다양한 전시회와 함께하는 플리마켓(벼룩시장)을 마련했던 ‘사이사이 프로젝트’, 공연 페스티벌을 열었던 ‘자립심 페스티벌’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고군분투한 젊은 예술가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냉혹하다. 거대 자본을 피해 터를 잡았던 공간은 하필 가장 자본주의적이다.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으로 보장되는 계약 기간은 5년. 그나마도 가게가 잘된다 싶으면 건물주는 계약 기간 중에도 리모델링 명목 등으로 임대료를 몇 배씩 올리기 일쑤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먼지투성이 창고에 사람을 불러들이고, 삭막하던 마을에 서서히 예술·문화를 꽃피우려 했던 젊은 예술가들의 노력은 ‘건물주에 좋은 일’로 끝나게 된다.
홍익대 주변, 서촌 등이 차례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에 무너졌고 젊은 예술가들은 문래동 등으로 옮겨갔지만 이마저도 위태롭기만 하다. “인디 공간의 공통점은 휘발성이에요. 언제 날아갈지 모르죠. 그래서 다 절절해요. 그런 그들보고 ‘버텨라’ 하는 것도 이기적이죠. 그래도 다양한 공간과 사람이 존중받는 서울이 됐으면 좋겠어요.” 조숙현씨가 말했다.
사라진 ‘토끼바’, 사라질 위기 ‘이리카페’
그의 바람과 달리, 책이 출간되는 동안 ‘연희동·연남동 편’에 6번째로 등장한 무개념 펍 ‘토끼바’는 문을 닫았다. ‘멍때리기 대회’의 기획자인 영상·퍼포먼스 작가 조현욱씨가 중국집을 손수 고쳐 만든 벽돌 바도, 외벽 페인팅도, 단골들이 그려준 보물 같은 드로잉도 다 사라졌다. 인디 문화 살롱인 ‘이리카페’의 주인장은 요새 “임대료를 동결해달라”는 성명서에 서명을 받으러 다니고 있다. 다른 공간들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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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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