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한강, 두렵고 낯선 세상으로 이끄는 영매

끔찍한 세상에 던져져 ‘자기소멸’ 꿈꾸는 주인공 내세워 인간 본질을 스스로 묻게 하는 작가의 마력
등록 2016-06-11 15:40 수정 2024-10-15 14:31
한겨레 김정효 기자

한겨레 김정효 기자


한강과 함께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의 공동수상자가 된 번역자 데버러 스미스에 대해 심사위원장인 보이드 톤킨은 “미와 공포의 기묘한(uncanny) 혼재”를 정확한 번역적 판단을 통해 결합시켰다는 점을 극찬했다. '채식주의자'(2007)에 구현된 세계뿐만 아니라 이에 대응되는 번역어의 활력을 잘 살렸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미와 공포의 기묘한 혼재. 아마 이것은 '채식주의자'뿐만 아니라 한강의 소설 전반에 관철될 수 있는 비평적 진단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소설의 기묘함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예리한 비평적 분석이 필요하다. 사실 한강의 소설들은 쉽게 읽힐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미와 공포의 기묘한 혼재”

이는 한강의 소설이 플롯이나 서사 구조 자체가 복잡해서라기보다는 주인공의 심리나 행동을 명료하게 인과론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데서 나타나는 불편함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범속한 일상인의 시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행동을 이해하게 하는 여러 형태의 암시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 행동의 필연성을 합리적으로 해명하는 것은 아니다.

한강의 첫 창작집 '여수의 사랑'(1995)에 수록된 같은 제목의 표제작에는 “더러워. 더러워서 견딜 수 없어” 하며 끝없이 손가락을 목에 넣어 토하고, “모든 사물에서 썩어가는 냄새를 맡”는 ‘정선’이 등장한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의 원형으로 보이는 이 인물의 이상행동은 유년 시절 아버지가 시도한 동반자살에서 자신만이 살아남고, 아버지와 동생인 미선이 여수 바다에 빠져 죽어버린 충격에 기인한다. 아버지의 폭력은 '채식주의자'에서 육식을 거부하는 딸의 입을 벌리고 강제로 고기를 쑤셔넣거나 그것을 거부하는 딸의 뺨을 가격하는 유년 시절부터 반복되던 가부장적 폭력을 통해서도 날카롭게 묘사된다.

'채식주의자'에서 육식 거부 모티프는 작가의 첫 장편소설 '검은 사슴'(1998)에 이미 묘사된 바 있다. 여기에서도 기억을 잃고 말하는 기능마저 잃어버린 주인공 의선은 왜 육식을 안 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냥… 소나 돼지나 닭이나, 어떤 짐승이 죽어야 내가 그 살을 먹는 거잖아요?”라고 말하면서 “싫어요!/ 정말 싫어요./ 싫어, 싫어, 싫어요.”라며 발작적으로 비명을 지르는데, 이러한 육식에 대한 공포는 정육점 앞에서 “갈기갈기 찢긴 사람의 시체를 본 것처럼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을 정도로 뿌리 깊은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갈기갈기 찢긴 사람의 시체와 그것이 썩어 뿜어내는 시취(屍臭)를 한강은 '소년이 온다'(2014)에서 거듭 환기시키고 있다. 이 소설 속에서 피 흘리고 찢긴 육체는 도처에 범람한다. 이 소설에도 육식을 견디지 못하는 여성 인물이 등장한다. 광주항쟁에서 살아남아 이제는 한 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는 김은숙이다. 군사독재 정권의 폭압적 현실 속에서, 광주의 상흔을 잊지 못하는 그녀는 현실의 거듭된 폭력에 저항하지 못한 채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치욕이다. 하지만 더 큰 치욕은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라고 그녀는 인식한다. 그녀가 육식을 견디지 못하는 이유는 이런 역사적 상흔, 사실과 관련 있다. 다음 인용문을 보라.

“그녀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순간을 견디지 못했다. 살점 위에 피와 육즙이 고이면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있는 생선을 구울 때는 눈을 감았다. 프라이팬이 달궈지며 얼었던 눈동자에 물기가 맺히고, 벌어진 입에서 희끗한 진물이 흘러나오는 순간, 그 죽은 물고기가 뭔가를 말하려 하는 것 같은 순간을 느꼈다.”

두렵고 낯선 세상을 중개하다

한강의 소설은 비통한 역사 앞에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반복해서 묻는다. 1980년 5월 광주, 진압군에 희생된 이들의 주검 주변에 모인 시민들. 연합뉴스

한강의 소설은 비통한 역사 앞에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반복해서 묻는다. 1980년 5월 광주, 진압군에 희생된 이들의 주검 주변에 모인 시민들. 연합뉴스


물론 그 말은 광주항쟁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못다 한 말 또는 원한일 것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자들은 사자(死者)의 언어를 듣거나 번역할 수 없다. 비통한 역사 앞에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천형 같은 수수께끼의 반복 강박이다. 그러나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서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뒤집는다.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영어식 기묘함(uncanny)이라는 말로 한정할 수 없는 세계 속 인간을 묘사하게 만든다. 차라리 나는 한강의 소설에 등장하는 상황과 인물들을 독일어 ‘운하임리히’(unheimlich), 즉 두려운 낯섦의 세계로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의 웅변적 표상은 사자(死者) 또는 유령이다. 방금 전까지 따뜻한 호흡을 뿜어냈던 사람이 차갑게 굳어 있다. 표정 없이 경직된 그 신체는 낯설어서 두렵고, 두려워서 낯설고 끔찍해지는 것인데, 이것은 샤먼의 방백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 전율과 흡사하다. 그때 언어는 사람의 언어가 아니라 사자(死者)의 언어에 가까운 것인데, 내 판단에 작가 한강은 그런 사자의 언어를 중개하는 영매처럼, 끝없이 자신의 인간됨을 의식적으로 지워나가는 인간들에 대해 소설을 쓰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좀 엉뚱하기는 하지만 이 질문을 최초로 던진 것은 붓다였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해명한 것은 찰스 다윈이 아니었을까. 이것은 대단히 엉뚱한 진술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한강의 소설을 한국에서도 또 영국에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비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붓다가 출가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생명이란 것의 본질을 우연히 발견한 데서 온 충격 때문이었다. 어린 붓다는 어느 날 거리를 걷다가 벌레가 새에 잡혀 먹히는 것을 보고 거대한 충격에 빠진다. 또 어린 붓다는 농사를 짓는 노인이 소를 채찍질하는 것을 보고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또 다른 충격에 빠진다. 왜 하나의 생명은 살기 위해 살생할 수밖에 없는가. 왜 하나의 생명은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다른 생명에 폭력을 가할 수밖에 없는가.

붓다의 의문을 서양 특유의 합리주의로 해명한 것은 찰스 다윈이다. 그는 '종의 기원'(1859)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유쾌하게 빛나는 자연의 얼굴을 바라본다. 먹을 것이 지나치게 풍부한 상황을 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한가롭게 지저귀는 새들이 주로 벌레나 씨앗을 먹고 살며, 따라서 늘 다른 생명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지 못하거나 잊고 있다.”

이 문장을 설명하면서 철학자 김용석은 '서사철학'(2009)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그러나 자연이 삶으로 가득 차기 위해서는 다윈이 말하듯이 삶의 파괴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생명이 살고자 애쓰는 과정에 폭력과 공포, 살상은 일상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생명 있는 것은 모두 아름답다’라고 하는 만큼 ‘생명 있는 것은 모두 무섭다’라는 것이 생명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준다.”

한강의 소설에는 주인공인 ‘나’를 무는 ‘개’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채식주의자'에서 아홉 살 주인공을 문 개는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끌려다니다가 죽음을 맞는다. '검은 사슴'에서도 ‘나’가 우연히 마주쳐 연민을 품었던 개가 이유 없이 ‘나’를 물어버린다. 이 소설의 후반부에는 자동차에 치여 갈색 눈빛을 처연하게 드러내며 죽어가는 또 다른 개도 등장하는데, 이것은 '채식주의자'에서 아버지의 응징으로 죽어가는 개의 모습과 유사한 모티프로 보인다.

의도 없는 폭력과 죽음이 끌어낸 끔찍함

‘한강 열풍’은 얼마나 지속될까. 낙관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한국문학 현실이다. 연합뉴스

‘한강 열풍’은 얼마나 지속될까. 낙관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한국문학 현실이다. 연합뉴스


'희랍어 시간'(2011)에서 죽어가는 것은 백구다. 과속으로 달리던 자동차에 치여 허리 아래가 피투성이로 납작해진 개가 도로에서 거품을 물며 신음하고 있다. 이것을 본 주인공인 “그녀는 무작정 다가가 개의 상처를 끌어안으려 한다. 개는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어깨를, 가슴을 물어뜯는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 두 팔로 개의 입을 막으려 한다. 팔뚝을 한 번 더 물어뜯기는 순간 그녀는 기절했고, 어른들이 달려왔을 때 백구는 이미 죽었다고 한다.”

한강 소설 속의 개나 인간이 선의랄지 악의랄지 하는 것에 의해 죽고 또 충격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것과 완전히 무관하게 이들은 폭력에 노출되고 그것의 결과 죽어가거나, 소설 속 여러 인물들처럼 스스로의 생명을 소멸시킨다는 게 한강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느끼는 두렵고도 낯선 끔찍함의 이유다. 물론 한강 소설에 등장하는 개 모티프는 항상 아버지의 폭력 또는 무책임과 연동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한강의 소설을 가부장적 폭력이나 국가폭력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하면 어떨까 하는 유혹이 남긴 한다. 하지만 그의 여러 소설들을 치밀하게 검토해보면 그것을 단적으로 확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한강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주인공 역시 말과 시력을 잃어가거나, 정신의 혼수상태 속에서 헤매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명백한 것은 한강이 서사화하는 모든 주인공들은 삶을 위한 투쟁이나 자기보존 대신 자기소멸에의 욕망으로 충만해 있다는 사실이다.

한강에게 인간의 삶과 역사란 폭력이 구조화된 공간으로 인식되는데, 이로부터 필사적으로 도주하기 위한 주인공들로 하여금 인간됨의 표식인 언어나 육체성을 지워내는 강박적 행위에 몰두하게 하거나, 극한적 상황으로 내몰리게 만드는 것 같다. 인간의 역사화라기보다는 자연화라고나 할까. 한강의 소설은 인간을 자연사(Natural History)라는 거대한 생명사슬 속에서 낯설게 인식하게 만들고, 생명의 질서가 폭력과 살의와 공포로 구성돼 있으며, 이 악무한의 질서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오직 소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식의 비극적 세계관을 잘 드러낸다.

자기소멸을 꿈꾸는 주인공들

이런 인식을 체현하는 인물들의 극복될 수 없는 상흔과 이상행동 때문에, 그녀의 소설은 기괴하고 낯설고 끔찍한 느낌 속에서, 대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독자가 자문하게 만드는 마력을 갖고 있다. 소설이 아닌 ‘시설’(詩說)인 것이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카카오톡에서 <한겨레21>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