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신문기자 시절, 좋아했던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가 노인을 인터뷰하는 일이었다. 유명인사나 연예인 말고 그냥 노인.
한번은 100년을 산 노인을 만났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 다음해에 태어난 이였다. 은행원으로 유복하게 살았고, 자녀들은 모두 서울대와 외국 유수의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다. 그에게서 일제 치하의 고통이나 가난했던 시절의 그늘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일본의 탄압이나 수탈을 실제 경험해본 적이 없는 듯했다. 그는, 생계에 허덕였던 민초들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역사의 소용돌이와는 상관없는 개인적 세계에서 살아온 이였다.
그보다 한 해 앞서 취재차 만난 복덕방 노인에 대한 기억이 교차됐다. 14평 낡은 적산가옥. 그의 병든 아내는 찬장 구석에서 꺼내온 듯한 꽃무늬 찻잔에 담긴 믹스커피를 방 한가운데 내려놓았다. 방 안은 온갖 상패와 표창장, 오래된 잡동사니로 너저분했다. 복덕방 노인은 일제 징집을 거쳐 우익청년단체 활동을 하며 좌익노조 공격에 앞장섰고, 40여 년간 복덕방을 하며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등 국가가 동원하는 일에 생을 바친 이였다.
그는 인터뷰 내내 지나치게 씩씩했다. 군대, 반장, 지휘, 개근 등의 단어가 난무했다. 그는 삶의 마디마다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주로 총재, 장군 같은 사람들)과 계급, 감투의 이름을 놀랍도록 구체적으로 기억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든 명예롭게 포장하려 애썼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듯한 두 노인의 생각은 비슷했다. 그들은 빨갱이를 몰아낸 박정희와 깡패를 소탕한 전두환을 존경했다. 태도 자체에서 호감을 주는 것은 강남 노인이었다. 치부는 감추고 치적만 드러내려는 복덕방 노인의 과시적 태도는 인터뷰 내내 나를 불편하게 했다.
이후엔 거리의 노인들이 달리 보였다. ‘나는 그들을 알지 못한다’는 생각을 줄곧 했던 것 같다. 대한민국어버이연합, ‘짤짤이 순례길’의 노인, 고독사하는 노인을 볼 때도 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언덕을 오르고 있다. 오직 내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무언가로부터 미끄러져, 자신이 있는 장소에 승인되지 못한 존재로 서 있다는 사실, 그래서 어디에서도 그들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일본에는 ‘이바쇼’(居場所)라는 말이 있다. ‘있는 곳, 거처’ 등으로 직역되는데, 사회학·건축학에서 ‘안심할 수 있는 장소, 자기 본연의 모습 그대로 있을 수 있는 장소’의 뜻으로 쓰인다. 일본 도쿄대학 니시데 교수는 “그곳에 있다는 것이 타인으로부터 수용·승인되는 장소를 비로소 이바쇼라고 할 수 있다”고 정의했다. 최근 고령화로 고독사 등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실외 공간의 ‘노인의 이바쇼’에 대한 연구도 있는 모양이다. 어느 벤치,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진출입로 등 노인이 머무는 장소의 패턴을 연구해 이들을 위한 공간을 조성하자는 것이다.
시공간이 나로부터 멀리 휘어져 더 이상 ‘있어도 되는’ 장소가 없어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지칠 줄 모르고 이야기를 토해내던 복덕방 노인은, 어느 순간 돌연 무너져내렸다. 가끔 위트 있게 찡긋거리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는 허둥대다 그의 쭈글쭈글한 손을 잡고 같이 울고 말았다. ‘어버이연합’은 어떤 노인들에게 ‘이바쇼’일 것이다. 어버이들을 볼 때마다, 울던 복덕방 노인을 떠올린다. 이것이 비극인지 희극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들에게서 미래의 내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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