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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에 짓눌린 기억

베셀 반 데어 콜크의 <몸은 기억한다>
등록 2016-02-26 13:14 수정 2020-05-03 04:28

프리모 레비는 책 에서 전쟁이 끝나자 이상하게도 수용소 시절 1년의 기억을 통째로 잊어버린 같은 아우슈비츠 생존자 동료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리모 레비는 작가로서 자신이 겪은 일을 증언하고 기록하다가 1987년 돌연 목숨을 끊었다. 곧 한국에서도 개봉을 앞둔 영화 엔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일하는 시체처리 작업반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안에서 비명이 터져나오는데도 닫힌 가스실 철문 앞을 지키고 섰다가 시체들을 치우고 태우는 그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무표정이다. 베셀 반 데어 콜크의 (을유문화사 펴냄)를 읽다보면 이들이 한 가지 의미를 가지고 되살아난다. 바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다. 인간의 마음은 자신의 치유 한도를 넘는 경험을 하면 공포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도록 마음을 바꿔버린다.

마음과 감정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경험은 전쟁만이 아니다. 미국 질병통제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5명 중 1명은 어린 시절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고, 4명 중 1명은 부모에게 몸에 자국이 남을 정도로 맞은 적이 있으며, 커플 3쌍 중 1쌍은 상대의 신체폭력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전체 인구의 4분의 1은 알코올에 중독된 친인척의 손에서 자랐고, 8명 중 1명은 엄마가 맞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다. 이들은 생존 공포와 극도의 수치심에 침몰당하지 않기 위해 무감각 상태에 빠지거나 급격한 분노 발작을 일으키거나 자신을 둘로 분리해서 생각하거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아예 지워버린다. 책에는 어릴 때 아버지와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잊어버린 여자 환자 이야기가 나오는데 원인 모를 숱한 증상에 시달리던 이 환자는 다른 성폭행 피해자의 고백을 듣고서야 자신이 파묻었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낼 용기를 갖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분열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지우거나 왜곡한 사건을 몸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자신의 느낌을 설명하거나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감정인지불능증’이라고 하는데, 감정인지불능증 환자들은 아무런 감정 없이 눈물을 흘리고 분노하며 불안에 짓눌린다. 트라우마 경험을 연구하던 뇌신경 과학자들은 공포를 느낀 당시 상황을 재현하기만 해도 사람들은 좌뇌 전두엽 브로카 부분이 위축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때로부터 필사적으로 도주하고 싶은 사람의 마음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것이다. 치료도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인간은 얼마나 폭력과 잔인함을 지닌 채 살아가는가. 타인의 고통을 인정하는 일은 또 얼마나 어려운가. 이 책을 읽다보면 황폐한 슬픔을 느끼지만 그 지옥에서 일어서려는 이들이 우리를 부축한다. “나는 트라우마 치료가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환자가 살아남기 위해 몰두했던 노력을 경외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았다.” 1970년대부터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연구해온 지은이의 고백이다.

남은주 문화부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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