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음악가 백현진과 방준석이 모여 만든 ‘방백’의 앨범 을 듣다가, 그들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그들은 “어른으로서 일을 좀 해보자 싶었다”()는 말을 했다.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다소 달라진 셈인데, 지금까지는 나만 보고 일했다면, 이번엔 대중가요라는 판 안에서 어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생각했다고 했다.
책임을 진다는 것프런트맨 백현진에 대해 생각해보면, 내가 아는 한 그는 예술가로서 주로 어른의 대척점에 서 있었다.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형 아방가르드’의 기수였고, 웅얼거리거나 울부짖는 유령의 목소리는 무슨 단어를 말하든 반칙의 기조를 띤다. 그런 그가 이 음반에서는 ‘무거운 마음’에 대해 노래한다. “물론 어렵겠으나 그래도 너는 어쩌면 변할 수 있어”라거나 “이 노래가 너에게 가서 힘이 된다면” 하고, 듣는 이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건다. 이미 40대 중반인 그는 왜 이제 와 어른이 되려 애쓰고 있나?
그런가 하면 드라마 (SBS)에서 이방원(유아인)은 스스로 상투를 틀고 어른의 세계에 발을 내디뎠다. 그는 사대부 정도전이 그리는 국가에 미래 왕족인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결연하고도 비밀스럽게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려 한다. 결심을 굳힌 그는 어릴 적 친구 분이를 불러내 눈싸움을 하다가 눈밭에 드러눕는다. 그리고 어린 시절로 향하는 다리에 스스로 불을 붙인 아이처럼 울면서, 말한다. “분아, 이제 놀이는 끝났어.”
어른은 보통 인위적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주어진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의지’로 어른이 되려 한다. 굳이 ‘어른’이란 단어를 불러내 어떤 의지와 지향을 천명한다. 백현진은 세월호 참사와 망가진 엔터테인먼트 산업, 그리고 그런 조건에 처한 어른으로서 자신의 한심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방원은? 지금 어른이 되어 독립적으로 어디론가 나아가지 않으면, 또다시 길을 잃고 영원히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될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 보인다. 이들에게 어른이 된다는 건 자연스러운 도약이 아니라, 순리를 거스르는 불가피한 결정에 가깝다. 어쩔 수 없이 어른을 자처하고 나선 이들을 지켜보는 마음은 기쁘기보다 서글프다.
어른이란 무엇인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역할을 인식하는 것이며, 동시에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 독자적인 길을 가는 것이다. 이들이 실제로 그런 어른이 되든 아니든, 중요한 건 자신의 삶과 일에 대한 태도를 그런 방향으로 설정했다는 사실이다.
요즘 ‘어른’이란 단어를 생각만 해도 울컥하게 된다는 이들을 부쩍 많이 본다. 진짜 어른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다는, ‘내게도 어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일종의 결핍감 때문일 것이다. 신영복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시대의 어른’을 잃었다는 슬픔의 목소리가 드높았다.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인터뷰로 채현국 선생이 ‘참어른’ 붐을 일으켰을 때도 좋은 어른에 대한 엄청난 갈망이 비어져나왔다.
이해할 만하다. 어른은 ‘멘토’와는 또 다르다. 멘토는 조언하고 가르치지만, 어른은 자신의 삶으로 보여준다. 불안과 혼돈의 각자도생 시대에 누군가 내게 믿고 따를 만한 길을 몸소 제시해주면 얼마나 든든하고 좋은가.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면 언제나, ‘어른’의 범주에서 나 자신은 편리하게 빼놓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는다시 방백의 앨범으로 돌아와, 그들이 말하는 ‘어른의 노래’란 “처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애써 똑바로 보려 하는,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거짓을 도포하지 않는 노래”다. 앨범 속 화자는 반복되는 허망한 패턴에 한심해하고, 혼자 있어도 함께 있어도 부끄러워하며, 강은 범람하는데 좀더 갈 수 있을까 걱정하고, 시퍼렇게 멍든 마음에 노래가 힘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면서, “나름 할 수 있는 일을 해본다”고 다짐한다. 그런 정도의 어른이면 딱 좋겠다. 자신의 자리에서, 남이 뭐라든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각자가 그런 ‘작은’ 어른이 되자. 그게 큰 어른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것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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