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연초에 동창들을 만났다. 1년에 한 번꼴로 보는 친구들도 있었고 꾸준히 만나는 친구들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만난 친구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나뉘었다. ‘대화가 아예 안 되는 친구들’ ‘적어도 대화는 할 수 있는 친구들’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들’.
이들에 대해 나는 각각 다른 감정을 느꼈다. ‘대화가 아예 안 되는 친구들’의 경우는 ‘아, 어떻게 해도 대화가 안 되는구나.’ ‘적어도 대화는 할 수 있는 친구들’의 경우는 ‘아, 대화는 할 수 있지만 서로간의 차이는 어쩔 수 없구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들’의 경우는 ‘아,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였다.
함께 버텼기 때문에체념과 좌절이 대화를 지배했지만 세 부류의 친구들이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화제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우리가 어렸을 때, 철이 없었을 때, 무모했을 때, 그러니까 우리가 청춘이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우리는 회고를 통해서만 서로의 차이를, 서로의 비애를 극복할 수 있었다.
확실히 청춘이란 말에는 회고적인 뉘앙스가 있다. 그것은 일종의 신기루 같지만 저 멀리 눈앞에 아른거리는 사막의 오아시스와는 다르다. 청춘은 뒤돌아보면 그제야 나타나는 신기루 같다. 그것으로부터 떠나야만 청춘은 우리에게 푸른 봄이 되어준다. 곰곰 생각해보면 내가 그 안에 있었을 때, 청춘은 봄이 아니라 겨울에 가까웠다.
젊었을 때, 우리는 대체로 불행했고 우리 중 누군가는 더 불행했다. 우리 중 누군가는 찢어지게 가난했고, 우리 중 누군가는 감옥에 갔고, 우리 중 누군가는 죽기도 했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폭력에 노출돼 있었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그 시절을 웃으며 기억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불행했지만 함께 싸우고 노래하고 놀고 울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그 시절을 함께 버텼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혼자서 과거를 생각할 때가 아니라 함께 과거를 생각할 때 비로소 행복감에 젖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 시대의 청춘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전 시대의 불행이 여전하거나 혹은 더 심화되거나 혹은 새로운 불행으로 거듭났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행을 극복하는 일이 점점 각자 감당해야 할 몫이 돼버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시대의 청춘이 ‘응답하라’ 시리즈에 열광하는 현상이 나에겐 씁쓸하다. 그들의 행복한 기억이 자신의 과거가 아니라 타인의 과거, 아니 엄밀히 말하면 미디어가 제공하는 과거로부터 공급되는 것 같아서다.
하지만 또 다른 의문이 고개를 든다. 이 시대 청춘에 대한 나의 판단 또한 편견이 아닐까? 그렇다면 묻고 싶다. 이 시대의 청춘은 먼 훗날 자신의 생을 뒤돌아볼 때 나타날 푸른색을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을까? 솔직히 말해 나는 잘 모른다. 우리 세대의 푸른색과 이 시대 젊은이들의 푸른색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푸른색을 만들 의지하지만 새벽녘 편의점 앞에 옹기종기 모여 유쾌하게 떠드는 젊은이들을 볼 때, 시위 현장의 칙칙한 분위기에 생기를 불어넣는 청년들을 볼 때, 나는 생각한다. 푸른색을 만들어주겠다는 어른들의 약속들, 노동법과 청년정책에 연연하지 않고, 혹은 그 약속들을 자신들의 요구로 전환시키며 자신의 푸른색을 만들어가겠다는 의지가 그들에게 있을 것이다. 그 의지가 크건 작건, 집단적이건 개인적이건 그들의 삶과 일터에서 꿈틀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먼 훗날 그들이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볼 때 나타나는 색깔은 푸른색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전에 올라간 청춘이라는 단어 옆에는 ‘판타지’라는 새로운 정의가 붙게 될 것이다.
심보선 시인·사회학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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