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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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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풍자

등록 2015-08-07 14:40 수정 2020-05-03 04:28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은 보기 힘들었지만, 통쾌했다. 영화는 섹스·종교·폭력·젠더·죄의식 등 모든 금기를 해체해 자리를 바꾸고 모양을 뒤집어 마구 헤집어놓았다. 영화 속 인물들이 ‘니그로! 니그로!’(흑인을 비하해 부르는 용어)라고 말할 때 솔직히 속이 시원했다.
금기로 둘러싸인 현대의 인간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현대의 인간은 계속해서 추가되는 수많은 금기에 둘러싸여 산다. 필립 로스의 소설 을 보면, 인간의 몸에 얼마나 많은 얼룩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가 생각하게 된다. 주인공 콜먼은 대학교수인데, 강의 시간에 흑인을 비하하는 단어 ‘스푸크’를 얼떨결에 내뱉었다가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이후 그는 계층·인종·민족·국가 등 모든 정치·사회적 경계를 벗어나, 순수하고 자유로운 몸뚱어리로서의 삶을 생각한다. 이 소설은 우리 몸에 붙어 있는 수많은 얼룩들이 실은 떼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라는 그림을 그려주었다는 것만으로 감동적이었다. ‘휴먼 스테인’은 보통 ‘인간의 오점(얼룩)’으로 해석되지만, 내겐 ‘착색된 인간’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최근 미국 코미디 드라마 를 보면서 두 작품이 연달아 생각났기 때문이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루이스 C. K.가 연출하고 주연하는 이 드라마에는 루이스가 실제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그의 코미디는 수위가 세다. 무대 위에서 그는 인종, 동성애, 외모, 여성 비하적인 언어를 쏟아놓는다. ‘정치적 올바름’이 중요한 윤리인 미국 사회에서 이런 발언이 불편하게 들리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그의 코미디가 가닿는 지점은 단지 그것들을 희화화해 말초적인 웃음을 이끌어내고, 그날 저녁 웃음으로 소비되고 끝나는 순간이 아니다. 그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함으로써 금기를 깨는 동시에, 인간이란 얼마나 우습고 나약한 존재인지,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위선과 허상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폭로한다. 그의 코미디는 처음 볼 때 약간 의아하고, 보는 내내 미칠 듯이 웃기지만, 다 보고 나면 좀 슬퍼진다.(“루이스는 세상에서 가장 안 웃긴 코미디언이다.”)

나는 부끄럽지만 루이스를 보면서, 새삼 코미디라는 예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루이스의 스탠드업 코미디는 이나 에 버금가는 카운터펀치였다. 맞아, 코미디란 이런 거였지. 코미디란 이렇게 멋있는 거였어.

사회마다 금기는 다르기 마련이지만, 이 나라에서 금기의 한계치는 한없이 아래로 내려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와 ‘대통령’을 TV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금기가 된 모양이다.

얼마 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문제로 방송통신위원회 제재를 받은 의 ‘민상토론’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민상토론’에는 그즈음 가장 뜨거운 정치 이슈가 소재로 등장한다. ‘당내 계파 분열’ ‘김무성과 문재인’ 등 정치 이슈의 구체적인 고유명사가 코미디 프로그램에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 통쾌한 느낌이 든다. 금기의 한계치가 무한히 낮아진 탓이다. 그러나 그들이 뉴스를 다루는 방식은 사실상 기존 논의의 거친 축약, 인상평 정도에 머문다.

코미디언들에게 경배를

오히려 초창기의 ‘민상토론’을 보면, 뉴스는 소재이고, 이들이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박영진(사회자)이 유민상(개그맨 패널)에게 4대강 사업에 대해 묻는다. “네에? 그런 걸 왜 개그맨한테 물어봅니까. 우리 제발 ‘재미있는’ 얘기나 합시다.”(유민상) “아아 그러니까, 의견은 있는데, 개그맨이니까 그냥 바보 흉내나 내면서 살이나 뒤룩뒤룩 찌우겠다?”(박영진) 이 코너를 보면서 마음 깊이 무언가에 찔린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국정원 해킹’이나 ‘4대강 사업’에 대해 말할 때가 아니라 바로 이런 코미디언으로서의 자조가 등장할 때였다.

“왜 사람들이 살인을 더 하지 않는지 궁금하다”(루이스 C. K.)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박근혜! 박근혜!’가 금기로 추가된 이 왜소한 풍자의 나라 코미디언들에게 경배를. 그런 코미디를 지켜보는 관객도 때때로 웃기보다 슬퍼진다.

이로사 객원기자·현대도시생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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