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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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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야?” 묻는 내 아이들에게

20년째 한국살이 중인 자스민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답… “넌 이 세계에 속해 있단다”
등록 2024-09-13 18:32 수정 2024-09-20 10:59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자스민(가명), 내가 그를 인터뷰하기로 약속한 곳은 한 시민단체의 공유 오피스였다. 사전에 전해 들은 정보는 그가 탄자니아 출생이라는 점과 두 아이의 엄마라는 것뿐이었다. 인터뷰 질문지를 작성하며 탄자니아를 떠올렸을 때 내가 자연스럽게 연상할 수 있었던 건 킬리만자로산과 탄자니아 출신인 20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압둘라자크 구르나였다. 소설을 읽고 쓰는 작가라서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난 구르나의 대표작을 읽은 것 외에 그가 평생을 난민과 식민주의에 대해 탐구한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자스민과 마주한다면 어떤 주제로 이야기가 전개될지 모르기에 탄자니아의 핵심적인 역사나 문화, 기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익혀두었다.

고교 졸업 뒤 한국행 택한 자스민

콘로 스타일의 레게 머리를 한 자스민과 통역사를 통해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내가 그에게 건넨 첫 번째 질문은 고향에 대해서였다.

“자스민, 당신의 고향은 탄자니아의 어느 지역인가요?”

자스민은 내가 한국어로 질문할 때마다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매번 그는 내 질문을 정확히 알아들은 듯 통역이 영어로 번역하기 전에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므완자.”

처음에 난 그의 발음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만자”로 들리기도 해서 두 번을 반복해 물었더니 그녀는 스펠링을 천천히 불러주고 나서 스마트폰으로 므완자의 풍경을 보여줬다. 그곳에서의 어린 시절을 물었을 때 자스민은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잠깐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영유아기에 교통사고로 부모를 여읜 그녀는 6살 때부터 삼촌 댁에서 자랐다고 한다. 무뚝뚝하고, 그녀와 감정적인 소통이 거의 없었던 삼촌은 대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어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후견인으로서 학비 지원을 잘해줬다고 한다. 자스민은 초등학교 시절엔 낮 시간을 종일 학교에서 보내고 늦은 시간 집에 돌아와 잠자는 일을 반복했다. 이후 다녔던 미션 스쿨과 고등학교 교육은 모두 기숙사 생활이었다. 집에 오는 건 고작 한 달에 한 번 정도였으니 자스민은 유년 시절을 즐겁게 기억하진 않는 듯했다.

자스민이 한국행을 결심한 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였다. 탄자니아에선 고등학교에서 대학교 입학까지 7개월을 대기해야 하는 시스템이어서 그는 그때 다른 국가의 대학들을 열심히 검색했다고 한다. 이유는 “유의미한 독립”이었다. 자스민은 독립적인 삶을 일찍이 꿈꿨다. 그는 최종 선교 차원과 외교 차원에서 지원하는 국비 지원 프로그램의 기회를 입어 국내 한 대학의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할 수 있게 됐다. 자스민이 한국에 입국했을 때는 2000년대, 그러니까 지금부터 무려 20년 전이다.

그렇다면 자스민은 어떤 이유로 20년째 한국에 머무는 것일까.

스스로 선택한 첫 인연과 두 아이

궁금했지만 자스민에게 섣불리 20년째 한국에 머무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는 한국에서의 대학 생활에 대해 한담처럼 가볍게 입을 열었다가 이내 사무실 공기의 무게가 달라졌다고 느낄 정도로 아픈 기억도 차분하게 서술하듯 말했다. 자스민이 배우고 싶었던 전공은 약학이었지만 국비 지원 프로그램에서 제공되지 않는 전공이라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했고, 졸업 후 국제구호기관에서 일할 꿈을 안고 내처 석사과정까지 졸업했다.

그때쯤 자스민은 한국에서 같은 국적의 남자를 만났다고 했다. 외국에서 만난 같은 국적의 남자는 유의미한 독립을 꿈꿨던 그에게 삼촌의 간섭 없이 스스로 선택한 소중한 첫 관계였다. 둘이 함께였던 동안 그는 두 아이를 낳았다. 첫째 아이는 탄자니아에서, 둘째 아이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첫째 아이를 임신한 뒤 자스민은 탄자니아에 돌아갔지만 이내 한국에서 일하는 남편을 만나러 다시 한국에 입국했다. 그때부터 그는 유학생 비자가 아닌 동반 비자를 갖게 됐다.

이후 둘 사이에 어떤 예민한 대화가 오갔는지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라 더 묻지 않았지만, 자스민은 그 남자를 연인으로 선택한 것에 대해 “좋은 결정은 아니었다”고 표현했다. 남자가 통보 없이 한순간 한국에서의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홀로 출국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자스민과 그의 아이들만 남게 됐다. 남자 명의의 집에서 당장 나와야 했고, 주거에 필요한 비자 문제도 홀로 해결해야 했다. 탄자니아에 있는 유일한 혈육 삼촌마저 세상을 떠난 이후라 자스민은 실로 막막했다고 한다. 아무 배려 없이 떠난 남자와 삼촌의 부재로 둘째 아이는 탄자니아에 출생 등록이 돼 있지 않아 현재는 거의 무국적 상태라 봐도 무방한 상태였다.

남자 명의의 집에서 쫓겨난 이후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은 임시적 지원이라도 제공할 수 있는, 그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는 단체를 찾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와 두 아이가 소지한 비자는 G1이다. 네이버에 검색해보면, G1은 “한국에서 다양한 이유로 체류를 연장해야 하는 외국인에게 임시로 체류 자격을 부여하는 비자”라는 설명이 뜬다. 1년에 한 번 비자를 연장하며 지금까지 지내온 자스민은 G1 비자의 불편함에 대해, 구직활동을 할 때 G1 비자를 모르는 인사담당자들의 갸우뚱함을 마주하는 것 정도라고 말했다.

“한국에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언제였냐”고 질문하자 통역은 “어려웠던 순간”을 “하드 챌린지”(Hard challenge)라고 에둘러 자스민에게 전달했다. 자스민은 탄자니아에도 마땅히 의지할 가족이 없었던 상황에 한국에서 만난 남자와 따뜻한 가정을 꿈꿨지만 남자가 그와 두 아이를 두고 떠난 그 순간을 꼽았다. 그 이후에도 자스민과 아이들에겐 “하드 챌린지”가 끊이지 않았겠지만, 그는 두 아이와 함께하는 일상에 대한 유쾌함을 잃지 않았다. 잠시 무거운 주제에서 벗어나 두 아이의 안부를 물었을 때, 자스민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 중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3학년인 두 아이는 한국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공교육을 받고 있었다. 밖에서는 유창한 한국어를, 집에서는 영어를 구사한다고 했다. 한국 아이들과 똑같이 한국 음식과 간식을 좋아하고 케이(K)팝에 열광하며 아이돌이 되는 것이 꿈이라는 아이들.

정해진 인터뷰 시간이 거의 마감됐을 때쯤 자스민에게 꿈꾸는 미래는 어떤 모습이냐고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자스민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선 있는 그대로 겸허히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내 질문에 자스민은 마땅한 꿈이 생각나지 않는 듯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내게 되물었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러곤 덧붙였다. 만약 오늘에라도 자스민이 사망한다면 탄자니아 여권만 있고 그곳에 마땅한 연고가 없는, 한국에서는 G1 비자가 전부인 아이들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집에서 케이팝 노래를 흥얼거리던 아이들이 가끔 “Who are we?”라고 물을 때, 그때마다 그는 “엄마도 모르겠어”라고 얼결에 대답했다가, 이내 긍정의 의미로 이렇게 덧붙인다고 했다. “넌 이 세계에 속해 있단다”라고. 사실상 무국적 상태인 아이들에게 엄마인 그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한국에 와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여느 한국 아이들과 다르지 않은 

자스민은 현재 영어 강사들을 코칭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출근 시간에 맞춰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의 손에 샌드위치를 들려 보내며 따뜻한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는데, 2년 전 다큐멘터리에서 우연히 봤던 ‘노만’이 떠올랐다. 그 다큐는 지금부터 무려 10년 전인 2014년 5월, 교육방송(EBS) 2TV에서 방송한 휴먼 다큐였다. ‘열여덟 노만의 꿈’이라는 부제로 등장한 주인공 노만은 미등록 체류 중이던 파키스탄 출신 부모가 본국으로 돌아가고 홀로 한국에 남아 생활하고 있었다.

영유아기에 부모의 손을 잡고 한국에 온 노만은 대안학교에서 한국식 교육을 받고 자라 말투부터 표정까지 이질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한국적인” 아이였다. 파키스탄어보다 한국어가 훨씬 유창한데다 스스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소중히 생각했던 노만은 한국에 남고 싶어 했지만 결국 복잡한 비자 문제로 추방당했다. 처음 노만의 삶을 다큐로 들여다본 날,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노만은 파키스탄인일까, 한국인일까. 노만의 삶은 이후 어떻게 될까.

유튜브에 해당 다큐가 소개된 이후 댓글창에도 노만의 삶을 두고 치열한 토론이 펼쳐졌다. 노만 같은 친구는 한국인으로 받아줘야 한다는 온정주의와, 안타깝지만 선례를 만들면 이후 이런 사례를 악이용하며 국적 신청 난민이나 외국인이 더 많아질 것이라는 원칙 사이에서 쉽사리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파키스탄에 돌아간 이후에도 노만은 간간이 소식을 전했다. 노만의 여동생인 니말은 한국에서 태어나 13살에 난생처음 파키스탄으로 추방돼 제2의 삶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당혹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지금도 가끔 유창한 한국어로 파키스탄에서의 삶을 소개하는 니말의 유튜브 개인 계정을 들여다보며 노만과 니말, 그 가족이 안녕하기를 응원하는 작은 마음이 자스민의 두 아이에게로 옮겨간 건 나에겐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2019년 8월29일 방송된 한국방송(KBS) 스페셜 ‘십년 후 동창생’은 홍익대 미대생인 정다경의 시선에서 출발해 10년 전 부산의 다문화 대안학교에서 만났던 다문화 친구들의 현재를 짚었다. 해당 다큐를 제작한 이호경 피디(PD)는 “다큐가 제작되기 10년 전부터 한국은 다문화 사회를 앞두고 관심과 경계가 엄청났다. 그리고 10년 후 한국 사회의 고민과 노력은 성과를 거두었을까? 아이들의 10년을 통해 한국 다문화 사회의 명암을 보고 싶었다”고 제작 의도를 밝힌 바 있다.

‘노만’ 그리고 10년 뒤 자스민의 아이들

노만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건 2014년, ‘십년 후 동창생’ 다큐를 통해 노만을 포함한 한국인 정체성을 지닌 다문화 아이들이 소개된 건 2019년, 그리고 자스민의 두 아이 존재를 알게 된 2024년. 노만에서 자스민의 아이들까지, 이 둘 사이엔 벌써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개인적으로 주목할 만한 두 가지 이슈를 꼽는다면 2021년 은유 작가가 국가인권위원회와 손잡고 미등록 이주아동들의 생생한 현실을 인터뷰한 ‘있지만 없는 아이들’을 펴낸 것과 같은 해 법무부가 인권위의 권고를 일부 수용해 발표한 ‘국내 출생 불법체류 아동 조건부 구제대책 시행방안’일 것이다. ‘있지만 없는 아이들’은 부모에게 체류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국가가 세지 않는 아이들, 무엇도 행하지 않았는데 법을 어긴 존재가 되어 사람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아이들, 은유 작가의 말을 빌린다면 있지만 없는 아이들인 ‘미등록 이주아동’이 국내에 무려 2만 명이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법무부가 2021년 4월19일부터 2025년 2월28일까지 일시적으로 시행하는 ‘불법체류 아동 조건부 구제대책’은 아동의 부모에 대해서는 출국 조처를 함이 원칙이나, 미성년 아동의 양육을 위해 미등록 체류 자녀가 고교를 졸업하거나 성인이 될 때까지는 한시적으로 체류를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다만 “국내에서 출생하고, 15년 이상 국내에서 체류하는 중이며, 신청일 기준 국내 중·고교 재학 또는 고교 졸업”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해당 방안은 미등록 이주아동 처우 개선의 시작점이다. 하지만 2만 명 미등록 이주아동에게 어떤 효과와 한계로 드러날지 아직은 긍정적으로 관망하기 어렵다.

자스민의 아이들 형편은 조금 나아 보인다. 해마다 연장해야 하는 불안감과 불편함은 있지만 어쨌든 G1 비자를 취득한 자스민 덕분에 아직은 등록 체류가 가능한 거니까. 인터뷰를 마친 뒤 추가로 더 알아보고 나서야 난 그날 자스민이 했던 질문에 현시점의 정책이 할 수 있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성인이 되면 자스민의 아이들은 취업 비자를 취득하거나 대학 진학을 통해 유학 비자를 취득할 수 있다. 두 비자 취득이 어려울 경우 현재의 조건부 체류 자격 부여 방안에 따른다면 1년 임시 체류 비자를 취득할 수 있다. 이 경우 해당 기간 안에 취업 비자나 유학 비자로 변경해야 한다.

‘하드 챌린지’에 몇이나 성공할 수 있을까

갓 성인이 된 자스민의 아이들이 취업 비자나 유학 비자를 취득하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을 것이다. 취업 비자는 전문취업 비자와 비전문취업 비자로 나뉜다. 전문취업 비자 취득 요건은 취업 분야와 관련한 대학 석사 학위 이상을 요구하며, 비전문취업 비자는 자신의 국가에서 한국어능력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자스민의 아이들은 ‘돌아갈 국가’가 없으니 비전문취업 비자를 받기 쉽지 않을 것이다. 유학 비자 발급을 위해서는 은행 잔고증명서로 한화 2천만원 상당의 재정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유학 비자 취득을 선택해 무사히 유학을 마친다면 자스민의 아이들은 계속 한국에 거주하기 위해 반드시 전문취업 비자를 취득해야만 한다. 혹은 대한민국 국민과 결혼해 한국에서 생활하기 위해 부여받는 F6 비자 발급이 가능하다. 2만 명 아이 중 이런 ‘하드 챌린지’에 도전해 성공할 아이는 몇 명이나 될까.

2025년 2월이면 ‘국내 출생 불법체류 아동 조건부 구제대책 시행방안’ 시행 기간이 끝난다. 자스민의 아이들에게 지금보다 더 괜찮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이다.

전춘화 소설가

*동료시민 이주민: 인구절벽으로 나아가는 한국에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주민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는 선택일 수 없다. 국가인권위원회와 공동으로 ‘이주인권’을 소재로 한 소설가들의 연속 기획을 선보인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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