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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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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에이스?

등록 2015-07-01 17:05 수정 2020-05-03 04:28

한국작가회의와 문화연대가 주최한 ‘최근의 표절 사태와 한국 문학권력의 현재’라는 제목의 토론회에 참여했다. 사건의 파장이 커지면서 그날 나를 비롯한 참여자들은 수많은 방송 카메라들 앞에서 말을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발표에 나선 평론가들은 신경숙 작가의 소설들에 내재한 표절의 흔적을 추적했다. 다른 한편으로 신경숙 작가의 문제적 텍스트들에 대한 비판적 의견이 어떻게 억압돼왔는지, 현시점에 어떻게 회귀하게 됐는지를 대형 출판사의 상업주의와 패거리주의라는 맥락에서 분석했다.

애정으로 포장된 구별과 위계의 시스템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나도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나는 한발 더 나아가 한국문학의 장을 관통하는 비평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다.

“‘자신의 전문적 역량으로 한국문학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거의 모든 한국의 문학잡지와 출판사가 운영하는 평론가 중심 시스템의 근간입니다. 한국의 문학장은 수많은 작은 시스템들과 소수의 거대 시스템들로 이루어진 총체입니다. 이 시스템들은 동일한 믿음에 의해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 시스템에서 표절 혹은 표절 은폐의 가능성은 언제나 잠재하고 있습니다.”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해 좋은 작가를 발굴하고 작품을 평가하고 담론을 개발해야 한다는 비평적 믿음은 대형 출판사의 평론가나 그들을 비판하는 평론가나 모두 공유하는 것이다. 이같은 비평적 믿음에 따르면 한국문학은 1:99건 50:50이건 언제나 에이스와 비에이스로 나뉠 것이다.

한국문학과 작가에 대한 애정으로 포장된 이 체계화된 구별과 위계의 시스템에서 문제는 표절이나 표절 은폐의 가능성에만 있지 않다. 이 비평적 신앙은 작품성의 우열과 무관한 문학장 내부의, 혹은 문학장과 시민사회를 넘나드는 다양한 문학적 실천, 창작과 독서의 상호작용을 간과해왔다.

나는 이런 주장을 펼치다가 개그맨의 유행어를 패러디하며 말했다. 여전히 비평 중심적인 관점에서 문학권력을 비판하는 “새로운 비평세력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경숙은 우리의 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다른 에이스 혹은 다수의 에이스들을 발굴하고 육성합시다.”’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당혹스러운 반전이 일어났다. 객석 일부에서 박수가 터져나온 것이다. 나는 순간 생각했다. ‘뭐지, 이 열광적 반응은?’ 내가 말을 마치자 사회자가 말했다. “‘신경숙은 우리의 에이스가 아니다.’ 오늘 헤드라인이겠네요.” 나는 우려 섞인 목소리로 기자들을 향해 강조했다. “저는 에이스를 발굴하려는 노력 자체를 반대합니다. 그 에이스가 한 명이건 오십 명이건.”

우려는 현실화됐다. 그토록 강조했는데도 그날 밤 인터넷에 오른 몇몇 기사들에는 “심보선 시인, ‘신경숙은 우리의 에이스가 아니다. 다른 다수의 에이스들을 발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구절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언제 이 프레임에서 벗어날까

내가 의도한 풍자적인 아이러니는 실패했다. 그것은 오히려 확신 가득한 구호로 둔갑했다. 나는 생각했다. ‘기자들은 섹시한 쿼트를 뽑아야 하니까. 정신없이 타자 치느라 맥락 따위 따질 겨를이 없었을 테니까. 하여간 기자들이란! 그런데, 그런데, 관객은 왜 박수를 쳤을까?’

그들은 분노와 실망에 젖어 있었다. 통렬한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한 사람의 잘못뿐만 아니라 우리가 속한 세계, 우리가 의심 없이 간직하는 믿음 자체를 반성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시종일관 죄인에 결박돼 있었다. 죄인의 단죄와 영웅의 등장, 우리는 언제 이 기대의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괜스레 서글퍼졌다.

그건 그렇고 남의 말이라 주장했는데 나의 말로 둔갑해버린 이 사태는 뭐라고 해야 하나? 역표절? 아이러니의 아이러니?

심보선 시인·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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