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 그래서 무언가가 새롭게 시작되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기다리던 사람에게 올 편지를 기다리며 우체통을 열어볼 때, 10년 만에 보는 친구를 만나러 카페로 들어설 때, 밤을 새워가며 기획안을 짰던 새 아이템의 샘플이 공장에서 도착했을 때, 우린 설렌다. 그것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 극장에 불이 꺼질 때의 설렘이기도 하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연애 고민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우리네 친구들을 보더라도, 그보다 더 애절한 눈물을 흘렸던 우리네 한국 근대사만 보더라도, 설렘에는 모종의 유형학이 존재하는 것 같다.
짝사랑, 썸, 유사연애
먼저 설렘의 전형적인 카테고리, 짝사랑이 있다. 짝사랑은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임을 향한 사랑이며, 그래서 더더욱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어찌 코흘리개 초딩이 담임선생님과 맺어질 수 있단 말인가. 두 번째 카테고리인 ‘썸’은, 짝사랑과 완전히 다르다. 썸은, 이러저러한 조건들 때문에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다. 오히려 썸에서 사랑을 막는 것은 서로의 조건, 눈치, 내숭, 아직 확실하지 않은 서로의 속마음 등이다. 언제든지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미스터 김과 미스 장은, 그렇게 썸을 탄다. 요컨대 짝사랑의 임은 영원히 다가갈 수 없기에 설레지만, 썸의 임은 현재진형형으로 스멀스멀 다가갈까 말까 머뭇거리기에 설렌다. 한국 현대사에서 기점은 단연 1987년(혹은 1998년?)인 것 같다. 유신 시절에 임은 언제나 짝사랑의 대상이었다. 영원히 올 것 같지 않은 민주주의는, 바로 그래서 더욱 애절한 임이 되었다. 하지만- 비록 혼전과 내분이라는 비용을 치르고서지만- 직선제 대통령들이 도래하였고,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 간판이 내걸렸을 때, 비로소 우린 임과 썸을 타게 되었다. 가장 극렬했던 썸은, 단연 노무현 정권 때 이루어졌다(바로 그 머뭇거림 때문에 우린 또 희생하고 눈물을 흘렸지만).
하지만 세 번째 카테고리인 ‘유사연애’는 ‘썸’과 또 다르다. 유사연애는, 임이 날 이미 좋아한다고, 나와 사귀자고 하는 것만 같고, 심지어는 이미 나와 연애하고 있다고 가정하고 시작하는 가상적 사랑이다. 한 사생팬(덕후?)은 무대 위 아이돌이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는 것을, 자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식이다. 유사연애는 짝사랑처럼 일방적이지만 그처럼 순수하지는 않고, 썸처럼 진행형이지만 그처럼 실재적이진 않다. 유사연애는 상상연애다. 그래서 유사연애의 특징은 ‘이야기’에 있다. 유사연애하는 나에게 임은, 내 망상이나 착각, 내가 만들어내는 이야기 속의 캐릭터가 되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유사연애는 이명박 정권 때부터 시작된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임을 그리워하고, 임을 사랑하고, 임과 연애하였지만, 그것은 마치 아이돌이 팬에게 무심코 던진 눈길과 말 한마디로부터 과장되어 만들어진, 우리만의 이야기였을 뿐이었다. 사실 임에게 팬은 새우젓일 테지만(수많은 눈들 중에 하나일 테지만), 그 팬은 임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망상 속에서 나오기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몽상 같은 이야기만 꾸며댔다.
2014년에도 유사연애는 극성이었다. 인터넷에선- 그들이 왼쪽이건 오른쪽이건- 잉여들이 자신만의 가설들과 이야기들로 스스로를 위로하였고, 극장가에선- 그들이 문관이건 무관이건- 가상의 임들이 미생들에게 가설적 사랑을 베풀어주셨다. 보수도 진보도 당파전과 내분으로 자기만의 임과 상상연애를 해댔다(특히 김무성은 연말에도 그의 임과 유사연애 중이다). 유사연애의 가장 큰 피해자는, 통합진보당이었다. 그들이 창당 때 그리워했던 임은, 결국은 상상 속 이야기 속으로 사멸해 들어갔다. 2014년 임의 또 다른 이름은 안전이었다. 우리는 임이 우리를 사랑해주리라, 보호해주리라 믿고서 보도를 걷고, 지하철을 타고, 배를 탔었고, 또 구조를 기다렸다. 그러나 결국 임은 오지 않았다. 임은 우리를 사랑한 적도 없고, 기억도 못했다는 것을, 침몰의 순간에야 우린 깨달았다.
가장 위험한 설렘유사연애는 현대적 증후군이다. 내 마음대로 사랑을 상상할 수는 있어서 달콤하지만, 그 망상이 깨졌을 때 상처는 가혹하다. 유사연애는 가장 위험한 설렘인 게다. 유사연애는 2015년에도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유사연애가 현실로부터의 도피처, 실재로부터의 지하벙커가 되어서는 안 된다. 2015년을 맞이하는 설렘이 조심스러워지는 이유다.
김곡 영화감독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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