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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리도 우유부단한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세대의 신종병 ‘결정장애’를 다룬, <결정장애 세대>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등록 2014-10-03 13:12 수정 2020-05-03 04:27

“네가 먹는 음식이 네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더니 저녁 메뉴를 정하는 데 1시간 넘게 걸렸다. 덩치가 큰 물건은 더욱 심각하다. “당신이 사는 집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는데 결국 혼자서는 이사갈 곳을 정하지 못해 온갖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해야 한다. 원래 이것은 병이 아니었다.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증상을 이르는 인터넷 신조어인 ‘결정장애’를 다룬 두 권의 책이 나왔다.

늘 ‘가능성’만 쥐고 있는 세대

현대인들은 눈뜨고 잠들 때까지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정보는 많아지는데 선택은 더욱 어려워진다. 심지어 ‘결정장애’를 앓는 사람들도 있다.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는 고객의 모습. 한겨레 윤운식 기자

현대인들은 눈뜨고 잠들 때까지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정보는 많아지는데 선택은 더욱 어려워진다. 심지어 ‘결정장애’를 앓는 사람들도 있다.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는 고객의 모습. 한겨레 윤운식 기자

책 (올리버 예게스 지음, 미래의창 펴냄)와 (레나타 살레출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에 따르면 이것은 선택지가 너무 많아 보이지만 실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세대의 신종병이다. 를 쓴 독일 자유기고가 올리버 예게스는 지금의 시대정신을 ‘뭐든지 가능해’라는 말로 요약한다. 대학을 졸업해도 부모의 지원을 받아 세계를 여행한다. 많은 취미와 여러 교육을 받으면서 행복해지기 위한 수많은 방법을 검토하도록 길러졌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너무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여러 종교의 교리와 세계관을 취향껏 조립한다. 책은 과잉 기회와 씨름하며 “늘 자기를 완벽하게, 전체적으로 ‘최적화’해야 한다”고 믿는 그들을 ‘메이비’ 세대라고 부른다. 늘 ‘가능성’만 쥐고 있는 세대라는 뜻이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앓고 있는 것도 아닌데 주의력 결핍에 결단력 박약인 세대는 이렇게 태어났다. 독일 학자들은 청년기를 15년 정도로 잡는데 역사상 가장 긴 청년기를 보내는 세대는 늘 여행하거나 배움 중이거나 쇼핑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지고 나다운 나가 될 수 있는지” 고민한다.

는 나다운 나, 고유한 존재가 되라는 권유 또한 자기계발서에 물든 결과라고 비판한다. 우리가 겪는 집단적 결정장애의 뿌리는 자수성가 이데올로기라 할 만하다. 삶의 모든 국면을 세심하게 살펴서 선택해야 행복과 자기충족감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우리는 와인이나 치즈뿐 아니라 성형외과, 상담소, 멘토, 자기계발서들을 고르며 시간을 보낸다. 성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섹스 코치나 섹스 학교를 골라 다니거나 다른 체위나 도구들을 시도해봐야 한다. 반드시 가야 할 길은 없다. 연애, 결혼 등 모두 선택의 문제다.

실은 그 빛나는 쇼윈도에서 제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지 모른다. 최근 독일 시사주간지 은 “말 관리사가 되려고 해도 석사는 밟아야 하고 자판기를 관리하려고 해도 전문교육을 받아야 하는” 독일의 교육 광풍에 대해 보도했다. 교육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인생의 기회에 대해 듣지만 결국 쥐꼬리만 한 월급에 혹사당하거나 실업급여를 받는 것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결정장애 세대’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고정적인 월급, 안정적인 직장을 원하는 동시에 한없는 자유도 누리고 싶다. 우리는 다만 날고 싶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날고 싶을 뿐이다”

는 자꾸만 결정을 미루는 사람들의 엉덩이를 찌른다.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분석하면서 주인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목숨을 걸고, 노예는 확실한 미래를 보장받고자 인정을 단념한다고 했다. 선택을 피하는 사람은 비참한 현실을 감수하면서조차 확실성에 매달린다는 것이다. 잘못된 선택을 할까봐 불안해서 선택을 못한다. 그러면서 더욱 불안해진다. “선택도 하지 않고 상실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환상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미루거나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것이다.”

남은주 문화부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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