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싸가지 결핍증’이 다시 화제에 올랐다. “우리가 이른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것이 아닌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회고록에서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자고 제안한 데 이어,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책 (인물과사상사 펴냄)에서 여태껏 싸가지 없다고 욕먹은 사람과 앞으로 욕먹어도 싼 사람들을 총망라한다.
“박근혜를 떨어뜨리려고 나왔다”
원조는 예상 가능하듯 “옳은 말도 저토록 싸가지 없게” 하면서 이미 많은 욕을 먹었던 유시민 전 의원이다. 책에 따르면 고질적으로 싸가지 없는 진보를 만들어온 진짜 원조는 진보정당 내에서 계파싸움을 벌였던 운동권과 좌파다. 이들은 주로 상대편의 비겁함이나 무지를 들먹이는 논법을 쓰는데 진중권이나 김규항 등도 책의 앞머리에 거명된다. 이들과 견해도 처지도 다르지만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를 떨어뜨리려고 나왔다고 말한” 이정희는 유시민과 똑같은 욕을 먹은 일이 있다. 책은 “문화적 현상으로 시작했다가 진보정치 진두지휘자인 듯 격상됐던… 김어준()은 싸가지 없는 진보의 이미지를 각인하는 데 톡톡히 기여했다”고 진단한다. 문화적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강남 좌파는 ‘왕싸가지’라고 부른다. 아니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 평균 유권자보다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자신들이 지지하는 사람이 선거에 당선되지 못하면 “유권자가 욕망에 투항했다”는 식의 진단을 내놓는 진보적 지식 엘리트들이 싸가지가 없다고 해야 한다.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싸가지의 정체는 무엇일까. 책에서 주로 비판하는 싸가지는 자신의 주도권만을 위해 이전투구를 감수하는 자기중심주의와 상대를 공격할 때 가능한 한 깊은 상처를 주기 위해 자신의 지적 역량을 총동원하는 극단적인 태도를 말한다. 반대로 싸가지 있는 태도는 공동체적 윤리를 존중하고 품위(아마도 예의)를 갖추는 태도일 듯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불행은 상식뿐 아니라 도덕에서도 지금 체제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체로 더 우월하다는 점이다. 보수와 진보의 도덕이 다르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그렇다. 오히려 진보는 수십 년 동안 체제 유지나 산업 발전을 위한 도덕성까지 자신의 것인 양 끌어안아왔다.
흔히 어떤 서열에서 윗사람이 순순히 따르지 않는 아랫사람들을 극단적으로 나무랄 때 ‘싸가지 없다’고들 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진보는 태생적으로 싸가지가 없다. 진보란 대체 무엇인가. 책에서는 새누리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을 광범위하게 진보라고 부르는 듯하지만 ‘강남 좌파’라는 말이 어떤 진보적 함의도 없는 수사인 것처럼 진보라는 말 자체가 수사인 경우가 더 많다. 지금 여당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진보적 신념이 아니라 대체로 상식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하나로 묶인다.
자기 통찰의 도구일까 보수의 덫일까
예의의 문제도 비슷하다. 정치인에게 현실정치에 걸맞은 품격을 갖추라는 주문을 할 수는 있겠다. 그런데 정치평론가나 새누리당을 싫어하는, 그래서 진보적일 수도 있는 시민들이 진보의 싸가지 없는 언행을 고스란히 내면화한 나머지 싸가지 없는 진보의 언어를 구성해왔다는 식의 생각은 진보의 자기 통찰을 위한 도구일까, 아니면 보수의 덫일까. 공동체적 윤리를 내면화하고 풀뿌리 정당으로 정비하는 일은 싹수 있는 대안일지는 모르겠지만 꼭 싸가지 있는 대안이라고 불러야 할 이유가 없다. 두 말이 거의 같은 뜻에서 나왔다고 해도 원래 ‘싸가지 없다’는 말 자체가 싸가지 있는 소리는 아니다.
남은주 문화부 기자 mifoco@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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