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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출발점은 ‘개인들’이었다

‘안녕들 하십니까’의 주현우씨 인터뷰를 시작으로 이 사건을
계보학적으로 심층 분석한 사람 매거진 <나·들> 1월호
등록 2014-01-11 15:24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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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십니까’ 현상은 낯설다. 언뜻 ‘프리허그 캠페인’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치유적 제스처일 뿐이다. 누군가 처음 인사말을 던졌다. 세상 사람 모두를 부르는 포즈를 취하지만, 정작 그 자체로는 아무도 부르지 않으면서, 신기하게도 안녕하지 못한 이들만을 요격해서 부르는 효과를 낳는다. 호명하는 이와 호명되는 이 사이의 ‘마주 보기’를 넘어 호명되는 이들끼리의 ‘둘러보기’까지 수행하게 한다. 그것은 영성적 메시지가 아니라 강력한 정치적 실천(저항)이 된다.

개인적 주체가 공적 의제 ‘내부화’

사건들은 ‘우연’의 얼굴을 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런 맥락 없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사람 매거진 1월호는 ‘안녕들 하십니까’의 최초 발화자 주현우씨와 최초 응답자 춘희씨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이 사건을 계보학적으로 심층 분석한다.

“모든 사건은 앞선 시간들에 예비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런 예비 동작도 없이 별안간 도래해 사실의 진경을 펼쳐놓는다. 결코 타이밍을 놓치는 법도 없다. 다만 어떤 형상을 하고 올지 미리 알 수 없을 뿐이다. (…) 사건은 언제나 새롭지만, 그 출현 과정은 매번 되풀이된다. 이 ‘차이’와 ‘반복’은 사실이라는 앙금을 남기는데, 그것은 소멸하지 않고 스미어 기억이란 형태로 축적된다.”

사실 ‘안녕들 하십니까’는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다. 기시감을 일으킨다. 은 그 기억의 흔적을 2002년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미선·효순의 추모 촛불집회에서부터 찾는다. 촛불집회는 그해 11월 ‘앙마’라는 아이디를 쓰는 한 네티즌에 의해 처음 ‘제안’된 뒤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 때도 촛불집회의 출현 과정과 양상은 똑같이 되풀이됐다. 2011년 희망버스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눈에 띄는 공통점은 바로 모든 출발점이 ‘개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지난 10여 년, 조직 중심의 운동이 고전을 거듭하는 사이 주요 사회운동적 사건들의 발화점이 지도자, 조직, 전략 어느 것도 갖추지 못한 개인적 주체들이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은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주체에 관한 담론에서부터 답을 찾아간다. ‘88만원 세대’ 담론이나 ‘자기계발 주체’ 담론, ‘피로사회’ 담론 등은 하나같이 무력하게 개별화된 주체들을 상정한다. 그런 개인들이 그동안 사건들을 기민하게 발생시켜왔다는 건 아이러니다. 하지만 개인적 주체들은 자본주의의 형상에 따라 자신의 저항적 역능도 변화시킨다.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심화될수록 그들의 잠재적 힘도 커지는 구조다.

그렇다면 가장 최근의 사건인 ‘안녕들 하십니까’는 가장 진화한 저항적 역능일까. 은 이 사건이 단순히 자신과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안녕을 묻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 최초의 발화자가 언급한 것은 철도노동자 대량 해고를 비롯한 공적 의제들이었지만, 자신의 개별적 안녕과 관련한 문제로 연결짓고 있다. 요컨대, 개인적 주체가 공적 의제를 ‘내부화’한 것이다. 이후 다른 대자보들도 분야만 조금씩 다를 뿐 모두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개인과 공공의 경계를 횡단해 자신의 신체 안으로 통합함으로써 공적 의제에 관한 하나의 중심이 해체되는 대신 모두가 중심인 거대한 무정형의 형식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체제 지속되는 한 그들도 진화할 것”

조직에 진입하려야 진입할 수 없는 배제된 세대의 급진화는 어쩌면 필연적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이 사건의 끝이 어디일까를 성급하게 물을 이유는 없다. 그들은 체제 안에서 길러졌기에 체제가 지속되는 한 그들도 진화할 것이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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