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한 노인이 서울 용산구 동자동의 한 쪽방촌에서 얼음이 얼어 있는 계단을 걸어 자신의 방으로 가고 있다.한겨레 이정아
“69억 인구에 비춰보면 국내엔 더 이상 가난한 사람이 없다. 아직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노동자 시인이었던 박노해의 이 말처럼 한국엔 더 이상 빈곤층이 없을까. 그의 말대로 서울역 노숙인들과 동자동 쪽방촌 사람들, 지하철의 걸인들은 단지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일 뿐인가.
사회적경제연구센터 신명호 소장은 (개마고원 펴냄)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자타가 빈곤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실제로 그들이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으며, 때로는 불행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고 있는데, ‘더 이상 가난한 사람이 없다’는 선언은 지각 없는 정부 관료가 국제사회에 대고 날리는 선전용 허풍과 무엇이 다를까? 아니면, 우리나라의 최저생계비 수급자들에게 ‘아프리카의 굶어 죽어가는 난민들을 생각하면서 당신들의 처지가 얼마나 행복한지 깨달으라’는 충고를 하고 있는 것인가?”
저자는 보릿고개를 경험한 노인은 휴대전화가 없어서 괴로워하는 청소년을 보고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말하겠지만, 그런다고 그 청소년의 괴로움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 노인 역시 다음달 방값을 걱정하는 처지라면 결코 자신이 과거에 비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내의 빈곤층에게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배부른 줄 알라고 하는 말도 ‘폭력’인 것은 마찬가지다. 빈곤은 항상 동시대 같은 사회의 구성원을 기준으로 평가돼야 한다. 이 책은 그런 관점에서 빈곤에 대한 한국 사회의 잘못된 믿음을 깨고 있다.
저자는 먼저 단지 소득이 부족한 것이 빈곤의 전부가 아니라 주거·고용·교육·건강·시민권 및 정치 참여의 기회 등 다양한 차원에서 결핍 상태에 있는 것이 빈곤이라고 폭넓게 정의한다. 유럽 국가들이 빈곤(Poverty)이라는 용어 대신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다. 수급자가 아니었음에도 불안정한 임금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다 도움을 청할 인적 네트워크도 없어 목숨을 잃고 만 시나리오작가 최고은의 이야기는 다차원적인 빈곤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인류학과 대학원 재학 시절 석사 논문을 쓰기 위해 철거민 정착촌에 들어갔다 그곳에 눌러앉아 12년을 살며 제정구 선생 등과 빈민운동을 벌였던 그는, ‘가난이 개인의 책임’이라는 오래된 편견과의 싸움을 놓지 않는다. 특히 빈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빈곤문화론’에 대해서는 사회구조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한 채, 그런 구조의 희생자를 비난한 이론이라고 비판한다.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빈곤에 대한 이런 오해가 하루빨리 깨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의 책은, 어느새 천박한 경제동물이 된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기실 빈곤은 더 넓은 차원에서도 정치적인 문제다. 최저임금이나 실업연금 같은 사회안전망의 문제, 고용 없는 성장이 진행되고 소득 양극화가 발생하는 경제의 문제를 간과하고서는 빈곤의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이 책의 후반부에 빈곤을 발생시키는 경제구조의 문제와 가난한 이들의 정치 참여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것은 그런 까닭이다. 가장 고약한 폭력인 빈곤을 극복하는 일은 결국 정치의 문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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