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마이어의 (임재서 옮김, 올 펴냄)은 버거운 책이었다. 상징과 억센 의미들이 빈틈없이 엮여 있는 이런 책이 요즈음 읽힐까? 포장을 벗기면 빈 상자만 남는 소설이 넘치는 마당에. 그러나 나는 이 묵시록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리라 결심했다. 덕분에 우리가 따라다닌 미국이라는 거인의 심장 소리와 함께, 다가오고 있는 중국이라는 거인의 발자국 소리도 들을 수 있었기에. 아시아와 유럽의 구인류 시대가 가고, 아메리카 신인류의 시대가 100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지만, 이제 그 신인류도 휘청거리고 있다.
타인에게 어떤 동정도 없는 인물들
땅을 찾아 동부인들이 텍사스로 밀려들던 시절이었다. 1849년 봄, 보름달이 뜬 어느 날 밤 코만치 인디언 약탈대가 엘리 매컬로 가족을 습격했다. 어머니와 누나는 살해당했고, 엘리는 포로가 되었다. 그는 부족이 절멸할 때까지 코만치 전사로 살아간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 동포들이 노예로 부리던 아프리카 흑인과 내가 비슷한 처지에 놓였구나 하고 깨달았노라 떠들면 멋이 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생각은 안 들더라고. 나는 내 문제만 생각했어.” 1915년 엘리는 스페인계 가르시아 집안으로 쳐들어가 그 집안 사람들을 학살한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그리고 21세기 오늘, 텍사스의 석유재벌이자 엘리의 증손녀인 진 앤 매컬로의 대저택으로 들어선 청년 울리세스 가르시아. 그는 이 늙은 여자에게 선언한다. “(엘리의 아들) 피터 매컬로의 증손자입니다.” 그녀로부터 들은 대답. “당장 이 집에서 나가.” 잠시 뒤 대저택에 치솟는 불길. 그 연료는 바로 매컬로 집안 소유의 유정에서 나온 가스였다.
소설 제목을 ‘살인의 추억’이라고 바꿔도 되리라. 엘리는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자금 수송대를 몰살하고 얻은 금을 종잣돈으로 가문을 일으키고, 가르시아 집안을 강탈함으로써 부자의 대열에 들어선다. 자기 울타리 안으로 말을 타고 들어오는 사람일랑 무조건 쏴버림으로써 땅을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땅에서 쏟아진 석유.
인물들은 남에게 어떤 동정심도 보내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가족일지라도. 작가는 코만치 인디언에게도 어떤 동정도 던지지 않는다. 인디언들을 위한 변명은 거의 한 구절, 어떤 인디언의 대사를 통해 드러날 뿐이다. “우리도 뺏었다. 그러나 백인들은 뺏은 땅이 마치 원래부터 자기 것인 양 행동한다.”
이 소설은 아메리카 서부의 역사에서 정녕 있어본 적 없는 요소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거기에는 모든 것을 주는 거대한 땅이 있었다. 그러나 타자(他者)에게 줄 한 뼘 공감(共感)의 공간이 없었다. 신인류는 이렇게 외친다. “그렇다. 내가 빼앗았다. 그러나 나로부터 빼앗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엘리에게서 텍사스의 자기 목장에서 의기양양하게 말을 몰던 조지 부시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은 지나친 강박일까?
지금 중국이라는 ‘거인’은이제 구인류로 눈을 돌려본다. 19세기까지 구인류의 대표주자는 여전히 인의예의(仁義禮義)라는 오랜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기원전 7세기 황허 일대의 나라들이 남방 초나라를 위협하러 남쪽으로 내려갔다. 초 성왕이 북방 연합의 맹주 제 환공에게 사신을 보내 타일렀다. “두 나라 사이가 멀어, 발정 난 말과 소가 서로 유혹하는 일도 없는데(風馬牛不相及), 어찌하여 이 먼 곳으로 오셨습니까?”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공물로 쓰는 포모(苞茅)가 들어오지 않아, 주나라 왕께서 술을 거르지 못하고 계시니, 우리 군주께서는 이를 걷으려고 하십니다.”
전쟁을 앞둔 자들의 위선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위선 밑에는 엄연한 우아함이 도사리고 있다. 지금 중국이라는 거인은 아메리카의 세계에 적응하고 맞서느라, 위선의 가면을 벗다가 우아함이라는 피부마저 벗긴 듯하지만. ‘너희가 아메리카를 아느냐?’ 알고 싶다면 잠시 그 핏물에 발을 담그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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