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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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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각슈퍼 올림

제4회 <한겨레21> 손바닥문학상 당선작
등록 2012-12-07 23:01 수정 2020-05-03 04:27

남자는 조린 음식을 좋아하는데 특히 두부조림을 최고로 쳤다. 지영은 유통기한이 내일까지인 두부를 냄비에 넣고 많다 싶게 조리고 나서야 그가 더는 오지 않는다는 게 생각났다. 한 끼 분량만 남겨놓고 용기에 두부를 담았다.

녹이 많이 슨 철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온몸으로 있는 힘껏 밀 때 마다 철문은 삭은 소리를 냈다. 할머니는 그새 집을 나선 모양이었다. 지영은 반찬통이 담긴 가방을 할머니 방문 앞 계단에 내려놓았다. 지난번 드린 냄비가 옆에 있었다. 냄비 안에는 삐뚤삐뚤하게 항시 고마워요, 라는 쪽지가 들어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갈 때 보지 못했던 종이를 나오다 보았다.

 

한련 화분 가져간 사람!

다시 갖다 놓으세요.

소중히 키우던 것입니다.

제발 돌려주세요.

 

공책을 단숨에 찢었는지 찢긴 면이 들쭉날쭉했다. 까만 매직으로 큼직하게 꾹꾹 눌러쓴 글자엔 화가 실려 있었다. ‘사람’ 글자 옆의 느낌표는 ‘노한 표정으로 사람을 부름과 동시에 바닥에 발을 구른다’는 대본의 지문 같았다. 다시금 둘러보니 종이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장으로, 보는 이의 눈높이에 맞춰 좌우 담벼락, 길이 넓어지는 바닥, 마을버스 정류장 옆 전봇대에도 붙어 있었다. 한 장을 쓰고 여러 장 복사한 게 아니라 모두 직접 써내려간 이 사람은 누구일까. 가까운 곳에 살 테고 글씨체로 보아 여자인데. 그깟 화분 다시 사면 그만이지. 누구는 나무랄 수도 있겠지만 지영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궁금하면서도 부러웠다. 그는 분실물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며, 화를 내야 할 땐 낼 줄 아는 사람이며, 어떤 절박함은 숨기지 않는 사람 같았다. 뭔가를 잃어버리면 체내 온도가 뚝 떨어지며 조그맣게 위축되는 지영과는 다른 사람. 지영은 잃어버리는 중이거나 잃어버린 것 앞에서는 본래 제 것이 아니었다고 급히 갈무리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것을 가져가려 손을 뻗다 눈이 마주치면, 상대가 무안할까봐 먼저 눈을 감아버린 적도 있었다. 나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야, 안녕, 하고 보내고 마는.

늦가을 여과지를 통과한 아침볕은 부드럽고 말갛지만 지영은 손을 들어 차양을 만들었다. 빛이 없어도 곧잘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쓰던 국어 선생님은 욕망이 없는 캐릭터에게는 이야기도 없다며, 욕망을 품은 사람이라야 사람의 마음을 잡아끌 수 있다고 했다. 교문 생김도 잊었는데 왜 그 말은 또렷할까. 내가 어디가 좋아요? 지영이 남자에게 물으면 당신은 무던해, 담담해서 좋아, 라고 말했다. 왜 떠나려고 해요? 라고 물었던가. 남자는 지영을 포스트잇이라고 불렀다. 어디든 붙어 있을 순 있지만 죽어도 붙어 있겠다고는 안 하는, 절실함이 모자라는 종이.

 

*

 

사람들은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어떻게 매일 한자리에 앉아 있느냐고 묻지만 앉아 있을 만큼 한가하진 않다. 틈틈이 쓸고 닦아야하고, 물건이 처박혀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진열에도 신경써야 하고, 코흘리개들의 잔돈도 받아야 한다. 다른 슈퍼에 들어섰을 때 어질러진 계산대 위에 TV를 켜놓고 화면 속으로 들어가버린 밉상 주인을 더러 보아서 지영은 TV는 아예 들여놓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짠 향나무 선반 위에 클래식 채널이 고정된 라디오와 꽃병을 올려두고 들어오는 이의 눈과 귀를 잠시라도 붙들고 싶었다. 슈퍼에서 한 정거장만 더 가면 마을버스 종점이고 하차하면 곧장 등산로라 사람들이 무시로 지나다녔다. 그들은 소식을 물어나르는 제비처럼 물건을 고르는 짧은 시간에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의 노래가 시작되면 라디오 클래식은 백 코러스로 작아졌다.

한 동네에서 10년을 살다 보니 슈퍼에 오는 사람들의 특징과 성격도 대충 짐작하게 된다. 1천원짜리라도 지폐는 모두 지갑에 넣어두는 깔끔한 사람, 5만원짜리라도 주머니에서 구겨진 채로 내주는 털털한 사람, 이참에 동전 처리하겠다고 1만원을 100원짜리 동전 100개로 치르는 실속 있는 사람, 동네 사람이니 외상 긋자는 넉살 좋은 사람, 안주도 없이 매일 술만 사는 소박한 사람, 어떤 품목이든 가장 싼 것만 고르는 알뜰한 사람, 이왕이면 제일 비싼 걸 고르는 고마운 사람, 잠깐 오는데도 다 갖춰 입고 오는 예의 바른 사람, 늘 속옷 바람으로오는 자유분방한 사람. 지영은 그들의 변화에도 민감하다. 새로 사 입은 옷, 근자에 바꾼 헤어스타일도 알아차리니까. 물론 알은체한 적은 없다. 가게 열고 얼마 안 돼서 꼬마 손님이 왔다. 계산대에 200원을 척 올려놓더니 2천원짜리 초콜릿을 태연히 들고 나가던 여섯 살의 정수는 올해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었다. 정수는 단것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변성기가 와서 없던 말수가 더 줄었다.

시간을 견디는 로맨스는 없듯 시간이 마모시키지 못하는 일은 없음을 지영은 슈퍼를 운영하면서 알았다. 더는 못 살겠다는 고성과 울부짖음이 밤을 가른 다음날, 눈 밑까지 모자를 눌러쓰고 여자는 양파와 두부를 사러 오고, 남자는 담배를 달라 한다. 아이들은 엄마가 들려 보낸 돈으로 소금이나 간장 따위를 사고 잔돈으로 과자를 집었다.

반복되는 일상에선 오랫동안 덮어온 솜이불 냄새가 난다. 한 번쯤 솜을 털고 싶지만 번거롭고 성가시다. 지영은 자신이 파는 생활필수품에서 나는 이불 냄새가 어떨 땐 좋았고 어떨 땐 싫었다. 직원은 한명이지만 엄격하게 관리되는 출근부에 도장 찍는 심정으로 지영은 매일 똑같은 시간에 셔터를 올렸다. 무엇도 바꾸지 않으려는 게으른 습관은 근면 성실함으로 비치기도 한다. 성적표 뒷면에는 담임선생님이 적어주는 행동 평가란이 있었다. 한 반 50명 아이들은 대개 네다섯 개 범주 안에서 분류됐다. 다소 산만함, 예의 바르고 인사성이 밝음, 주의 집중을 요함, 근면 성실함, 총명하고 명랑함. 고만고만한, 별 뜻 없는 평가라는 점에서, 한 사람의 근면 성실은 다소 산만한 성격 같은 것이다. 제아무리 성실해도 삶의 조건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으니 역시 분류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평소보다 더 열심히 바닥을 닦고 있다. 해가 뉘엿 지는데 오늘은 생수 2병, 맥주 2캔, 라면 3봉지, 수세미 1개, 반값 아이스크림 4개, 치약 1개, 참치 2캔, 화장지 2개를 팔았다. 1킬로 반경 안에 편의점이 2개나 생긴 게 6개월 전, 그때만 해도 총각슈퍼에 오던 사람들의 관성은 그런대로 유지됐지만 동네에서 시내로 접어드는 사거리에 대형마트가 들어선 한 달 전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조금 일찍 닫으려는데 종점 한의사가 수세미를 사러 왔다. 값을 치르고 나가다가 문 앞에서 다시 돌아오더니 지영의 안색을 살피기 시작했다. 가게는 금세 진료실로 변했다. 지영의 손목을 끌어다 맥도 짚었다.

“맥에, 맥이 하나도 없네요. 파란 감자에 싹 난 격이에요. 좁은 공간에서만 종종거리면 찾아오던 좋은 기운도 제 자리가 없다는 걸 알고 나가버려요. 쉬어야 해요.”

그는 지영에게 종이 한 장을 달라고 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처방전이라 쓰더니 한 줄 아래 山川을 떠돌다 올 것이라고 썼다.

“이게 처방이에요?”

“지금은 먹는 약보다 쐬는 바람이 더 급해요. 일종의 풍욕이라 생각하면 될 거요.”

지난 몇 년간 바람 한번 쐬질 못했다. 지영은 휴가를 허락해준 처방지가 마음에 들었다. 한의사의 흘림체는 동양화 같기도 했다. 지영은 처방지를 잘 펴서 액자에 넣고 라디오 옆에 세워두었다. 단출하게 짐을 꾸리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려 거듭 보았다.

낮에는 물만 보고 밤에는 별만 보는 호젓한 날들을 보냈다. 지영은 메마른 등걸에 물이 오르는 걸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고르지 못한 노면에 출렁이는 건 승객들이 아니라 지영의 몸속에 흐르는 물이었다.

 

*

 

2주 동안 쉽니다, 종이를 떼어내고 셔터를 올리다 여독이 풀리지 않아 헛것을 본 줄 알았다. 슈퍼 유리에 비친 맞은편엔 처음 보는 건물이 서 있었다. 옷을 수선하는 미자 할머니와 수선 가게는 어디로 가고, 처음 보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걸까. 당황하는 지영을 멀리서 보고 있었던 게 분명한 세탁소 할아버지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걸어왔다.

“이름이 요상하지? 건물이라는 게 2주 만에도 지어지더라니까.”

총각슈퍼라면서 처녀가 주인이라고, 동네 아저씨들은 가끔 지영을 놀렸다. 원래 있던 슈퍼를 인수하면서 지영은 상호는 바꾸지 않았다. 장수부동산, 온누리약국, 선미분식, 옥연동 신문보급소, 우리세탁소, 부흥쌀집 옆에 총각슈퍼는 꼭 어울렸다.

노블리카라는 상호는 그런 무채색들 한가운데 찍힌 강렬한 원색이었다. 여배우나 쓸 법한 깃털이 화려한 작은 모자, 비즈를 촘촘하게 달아 어깨선을 강조한 블라우스, 가슴골이 깊게 파인 원피스, 속 팬티에 가까운 반바지, 빛나는 보석들이 노블리카의 투명한 통유리 안에서 반짝였다. 그것들은 값비싸 보였다. 머리를 틀어올린 여자는 눈처럼 하얀 블라우스와 은은한 베이지색 미니스커트가 잘 어울렸다. 긴 목, 반듯한 쇄골에는 진주 목걸이가 걸려 있었는데 목걸이 스스로 기품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과시하는 것 같았다. 앙다문 빨간 입술은 그녀 어딘가에 감추어진 열정의 단서처럼 보였다. 지영은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남자의 눈으로 노블리카를 보았다. 그때 한 남자가 노블리카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조명 아래 선 두 사람은 손뼉을 치며 까르르 웃었다. 남자가 여자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지영은 의자에 앉아 손을 뻗어 두 사람을 손바닥 안으로 모았다. 두 사람이 쏙 들어오자마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답답하지도 않은지 둘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산 아래 오롯이 자리한 이 동네는 10년 전만 해도 기와지붕으로 잇닿은 한옥이 빼곡했지만, 목조건축물이 헐린 곳에 콘크리트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한옥은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다. 최근 1~2년 새 문화 연구하는 이들이 박물관에 버금갈 만하다고 언급하면서 낙후된 동네에서 단박에 보존해야 할 문화재가 되었다. 명맥만 유지되던 한옥이 ‘전통문화’라고 팔려나갔으니 그때부터였나 보다. 더 낡은 기와와 더 허름한 대문의 집값이 뛰고 동네에 활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쿵쾅쿵쾅 소음과 보풀 분진이 자욱한 공사장이 늘어났고, 잠잠해지면 어디선가 사람들이 들어왔다. 같은 일이 반복되자 동네 깊숙이 사람들이 말하는 상권이라는 게 형성됐다.

장수부동산 장씨가 바빠졌다. 많이 걸어 납작해진 그의 구두 뒷굽을 보니 알겠다. 장씨는 옆구리에 날렵하고 단단한 손가방을 낀 남자와 보조를 맞추며 쌀집, 우유보급소, 양품점, 떡방앗간을 매일 찾아다녔다. 비밀회담 같은 장면을 지영도 몇 번 목격했다. 부흥쌀집에 쌀 1만원어치를 사러 간 날, 묻지도 않았는데 네가 궁금해하니까 특별히 너에게만 말해준다는 표정으로 아주머니는 녹취를 풀었다.

“권리금은 물론이고 보상금까지 준다잖아. 가게만 내달래. 내 얼굴에 화색이 돈 모양이야. 부동산이 눈치를 주더라. 일단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돌려보냈어. 부동산이 잘했다고 추어세우더니 구매자들이 몸이 단 상태라 부르는 대로 줄 기세라는 거야. 협상을 하라는 거지. 슈퍼엔 아직 안 왔어?”

찰진 떡방앗간, 우리세탁소, 동네 미용실의 한옥 외관은 건드리지 않고 내부만 현대식으로 개조해 카페, 술집, 고급 옷집을 세울 거라 했다. 노블리카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조금씩 사두고 먹어야 쌀벌레가 생기지 않는데. 1만원어치씩 사다 먹는 쌀도 이젠 안녕이구나. 지영은 쌀 1만원어치의 무게를 기억해두려고 봉지를 들어 앞뒤로 흔들어보았다.

두부 정도가 아니었다. 총각슈퍼에는 유통기한을 넘기는 식료품이 자꾸 늘어갔다. 하나 구입하면 하나 더 끼워주기도 해봤지만 기한을 서너 시간 남긴 공짜는 인기가 없었다. 폐지 줍는 할머니만이 지영의 두부와 콩나물 조림을 미안해하며 기다렸다.

집에 와 밥을 안치고 다시 신발을 꺾어 신었다. 음식 장만을 하다 마늘이 떨어진 걸 안 주부가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걸어 덜렁 마늘 한 봉지만 사오기엔 다소 망설여지는 거리지만, 총각슈퍼의 말라 비틀어진 마늘을 떠올리면 마음을 다잡고 가야 하는 거리. 지영은 그런 주부의 심정으로 사거리마트까지 걸었다. 총각슈퍼에서 마트까지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

 

얕은 잠을 덮었더니 추웠나 보다. 온기를 그러모아 다시 자려 했지만 잠은 달아난 뒤였다. 잠자리에 든 흔적만 남은 이부자리를 밀쳐두고 머리맡의 시계를 보았다. 새날로 접어든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지영은 방문을 열고 문지방에 걸터앉았다. 음료가 빽빽이 들어찬 냉장고의 파란 빛을 받아 파랗게 잠이 든 매장의 물건들. 빛은 가늘게 낮의 일에까지 가닿았다.

빨갛게 점멸하는 사거리마트라는 네온이 없었다면, 대형 교회인줄 알았을 것이다. 뾰족한 첨탑에 상호가 걸려 있었다. 얼마나 거대한지 입구에 서 있기만 했는데도 마트는 지영을 빨아들였다. 교회라면 신도 1천 명은 족히 들어갈 만한 공간이었다.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를 연상시키는 마트 안 각 벽면은 막 잡아온 수산물과 물기를 머금은 채소, 유통기한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다양한 유제품들로 넘쳐났다. 채소 코너에는 깨끗이 씻겨 한 묶음씩 정돈된 마늘이 바로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냉기에 휩싸여 신선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영은 마늘 한 봉지를 집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영의 슈퍼에서는 볼 수 없는 물건이 많았다. 커다란 카트를 양쪽에서 밀고 다녀도 공간이 여유로운 홀을 따라 걷다 보면 빽빽이 진열된 신비로운 제품의 세계가 펼쳐졌다. 그 세계의 끝은 계산대로 수렴되었다. 차례를 기다리며 그득 채워진 카트 옆에 선 사람들의 얼굴에선 한곳에서 빠르게 해치웠다는 만족감이 묻어났다. 물건을 사러 간 게 아닌 일종의 염탐이었다는 불순한 의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영은 뭘 하나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영의 슈퍼에는 없는 물건을 고르고 싶었지만 그런 물건은 너무 많아서 무얼 집어야 할지, 지영은 밝은 대로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았다. 결국 치실 한 통을 들었지만 계산은 오래 걸렸다.

총각슈퍼에도 물건이 이렇게 많은데, 줄 서지 않아도 되는데 긴 줄을 마다 않고 기다리던 사람들. 총각슈퍼에선 한동안 물만 사가던 정수 엄마는 지영과 눈이 마주치자 지갑을 찾는 척한다. 마트 봉지를 들고 가던 화평빌라 101호 아주머니는 총각슈퍼 앞을 지날 때 봉지를 뒤로 감추고 걷는다. 그들이 총각슈퍼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불편하다고 해야 할지 고맙다고 해야 할지 정리하지 못한 채 지영은 매장의 스위치를 켰다. 가게 안이 대낮처럼 환해지자 방금까지 지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물건들 뒤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셔터를 올리고 밖으로 나왔다. 훅 추웠다. 겨울이 종점을 출발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기지개를 켜다 올려다본 하늘엔 빛나는 무엇이 있었다. 아마도 별이겠지만, 하나는 지나치게 빛나 별이 아닌 것 같았고 다른 하나는 겨우 빛나서 별이 아닌 것 같았다.

길엔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영은 소리를 따라갔다. 골목 안쪽에 자리한 빌라 아래서 아주머니와 아저씨 두 분이 집집마다 내놓은 재활용품을 분리하고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신문지와 플라스틱 통과 병들을 골라내는 뒷모습은 짚을 꼬거나 나물을 다듬는 사람 같아 보였지만, 들러붙은 음식물 찌꺼기 냄새 때문에 착시는 일순 사라졌다. 일주일의 3일은 밤마다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응체돼 골목도 두통에 시달렸다. 먹고, 마시고, 트림하고, 방귀 뀌는 골목의 내장을 어디선가 나타난 밤의 사람들이 닦아내고 있었다.

할머니도 보였다. 지영은 할머니를 알고 버려진 종이의 세계를 알았다. 허리가 굽고 시야가 어두운 또래 노인보다 조금이라도 먼저 나와야 하나라도 더 주워 모을 수 있는 세계. 짧은 골목길 안에 폐지 줍는 노인이 다섯이나 된다는 건, 하루 종일 긁어모아도 수중에 2천원을 쥘까 말까 하는 동네에서 다섯 노인이 1만원을 엇비슷하게 나눠가진다는 뜻이었다. 처음부터 1만원이 있지만 버려진 유모차에 폐지를 싣고 셀 수 없이 골목을 오가야 2천원을 손에 쥘 수 있는. 그들앞에서 편의점과 마트를 원망할 순 없다. 지영은 슈퍼로 돌아가 개켜둔 상자 한 무더기를 유모차에 싣기 편하도록 힘주어 묶으면서 읊조렸다.

“흔드니까 흔들리는 건….”

 

*

 

“엊그제 장씨 다녀갔다며? 상인연합회 사람 다 긁어다가 1년 넘게 데모했는데도 큰길에 떡하니 마트가 들어섰으니 딱할 노릇이지. 시한부로 오늘내일하던 아랫동네 재래시장도 그때 숨통 끊긴 거라고 봐야 해. 사람 목숨줄을 끊어놓다니 나쁜 놈들이야 아주. 그래도 말이야, 나는 총각슈퍼 나가는 거 반대야, 우리 동네로 말할 거 같으면….”

손가방을 든 남자와 함께 장씨가 슈퍼에 들어서자 세탁소 할아버지는 말을 멈췄다. 남자는 지난번에 보았던 손가방이 아니었다. 지영은 장씨에게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목례를 보냈다.

“장씨가 이 동네에서 제일 신난 거 같아.”

계산을 마친 할아버지가 장씨에게 던진 한마디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전사(前事)가 있었음을 짐작게 하는 감정이 묻어 있었다. 할아버지가 나가자 장씨는 도면을 탁자에 펼쳐 보였다.

“노인네, 어지간해야지.”

안으로 도르르 말리는 종이를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장씨는 지영을 보았다.

“이거 봐 슈퍼 언니, 소식 들었지? 분식점 언니는 지난주에 내놨어. 이게 선미분식 도면인데 슈퍼랑 비슷한 면적이야. 나를 잘 믿고 따라와서 섭섭지 않게 해줬지. 이 가격이야.”

장씨는 보상금 숫자에 빨간 볼펜으로 두세 차례 동그라미를 치더니 밑줄을 쫙 그었다. 지영이 가타부타 말이 없자 방금까지 했던 말을 반복했다. 손가방 남자는 짜증이 묻은 얼굴로 보는 듯 마는 듯 슈퍼 안을 휘휘 둘러봤다.

“세탁소 노인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머리 너무 굴리면 못써 언니야. 또 올게.”

릴레이 주자처럼 이번엔 쌀집 아주머니가 슈퍼로 뛰어들었다.

“합의 봤어?”

지영은 피식 웃었다.

“사고 처리해요? 합의는 무슨.”

“농담 말고 어서 말해봐. 얼마 준대?”

지영은 아무 말도 안 했다고 했다.

“왜? 왜 그런 건데?”

아주머니는 방금 끝난 시험의 정답을 캐묻기 시작했다.

“여길 넘긴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요.”

원하는 답이 아니어서 부아가 난 걸까. 아주머니는 팔을 걷어붙이더니 계산대를 내리쳤다.

“뭐라고? 그럼 이 고물을 끼고 죽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나도 보는 눈이 있어. 솔직히 장사 안 되잖아.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히 욕심 있다 자기. 시간 끈다고 더 받는 거 아냐.”

아주머니는 문을 거세게 열어젖히고 나가버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 때문은 아닐 텐데, 지영은 현기증이 일며 두 손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돈을 번다는 의미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시오”라는 질문지를 강제로 받아든 기분이었다. 슈퍼운영은 돈 버는 일임에 틀림없다. 돈을 벌지 않으려면 장사를 왜 하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내몰리면서까지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다. 그런데 누가, 정말이냐고, 그런 척만 하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면 자신 있게, 아니에요! 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억만금을 준대도 이곳에서 나가지 않을 테야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지영은 생각이 꼬이는 미로에 빠진 것 같았다.

 

평정심을 잃어버렸어요.

가져간 사람! 다시 갖다 놓으세요.

소중히 간직하던 것입니다.

제발 돌려주세요.

 

공책을 찢어서 욕실 거울에 붙여놓고, 지영은 양치질을 하며 계속 노려보았다. 거울은 슈퍼 유리창으로 변했다. 정수 엄마가 슈퍼로 들어온다. “간밤에 잠 안 자고 책 읽었구나?” 정수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들어온다. “초코바나 줘요.” 세탁소 할아버지가 들어오신다. “누가 밖에 낙서 붙여놨더라. 떼버려.” 부동산 장씨 아저씨는 보지도 않고 들어온다. (안 돼요. 읽고 다시 들어오세요. 지영은 등을 떠민다) “뭐야? 저런 거 붙여놔도 더 올려주지 않아.” 개량한복을 입은 행인이 들어온다. “도(道)에 관심 있으시군요.”

지영은 거울에 붙인 종이는 떼버리고 오늘은 쉽니다, 라고 다시 쓴 후 가게 유리창에 붙이고 문을 잠갔다. 내일까지 유통기한인 두부는 한쪽으로 밀어두고 어제 들어온 두부를 뜯어 많다 싶게 조렸다. 도톰하게 계란말이도 만들었다. 얇게 썬 호박에 밀가루 옷을 입혀 호박전도 부쳐냈다. 콩나물무침이 지겨워서 마늘을 굵직하게 썰어 넣고 맑은 콩나물국을 끓였다. 반찬은 3단 찬합에 가지런히 넣고, 국은 주전자에 담았다. 할머니 방문 앞에 어지럽게 흩어진 폐지는 정리해서 한쪽에 세워두고 지영은 보따리 2개를 계단 위에 내려놓았다.

혼자 드시기엔 많을 거예요. 저녁에 놀러 올게요. 종이는 보자기 사이에 끼워두었다.

지영은 처방전 액자를 내려 쓰다듬다가 장갑을 찾아 끼고 물 한통을 들었다. 멀리서 버스 타고도 찾아오는 산인데 자신은 마을버스 조차 탈 필요 없는 코앞의 산을 오르지 못했던, 아니 쳐다보지도 않았던 날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이제 왔냐고, 산이 자신을 밀어내는 통에 지영은 처음엔 겁을 먹었다. 소란스럽던 몸 안의 시름이 가쁜 숨으로 뿜어져나오자 고요해진 자리에 볕이 들기 시작하면서, 산도 지영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지영은 나무와 바위의 굴곡을 어루만지며 더 높이 올랐다. 그것들은 눅진한 이끼에 감싸여 있었고 두꺼운 표면에서는 한기가 느껴졌다. 흔드니까 흔들리는 건 하지 않으려고, 이끼는 이토록 단단하게 나무와 바위에 들러붙었을까. 그런 절박함이 켜가 된 걸까. 나무, 바위, 이끼의 가늠할 수 없는 생애가 그 순간 지영에게 깊숙이 들어왔다. 지영은 더 이상 차갑지 않고 마침내 시렸다. 누군가, 무언가 원했던 마음과 말하지 못한 말들 사이에 낮달 같은 내 욕망이 있었을 텐데. 지영은 내뱉지 못하고 가두어둔 말들을 생각했다. 보이는 건 온통 하늘뿐 더 오를 곳이 없었다. 달아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누구에게도 안녕, 여기까지인가봐, 라고 말할 수 없었다.

 

가게로 돌아온 지영은 공책을 꺼냈다. 글자 한자 한자에 평정심을 둘러 정갈하게 써내려갔다. 소중히 가꾸던 곳입니다. 가게는 팔지 않습니다. 총각슈퍼 올림. 찢기는 면이 들쭉날쭉하지 않도록 지영은 자를 대고 반듯하게 잘라냈다. 종이 모서리에 투명테이프를 두르고 가게 유리창에 붙였다. 멀리서 정수가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지영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야구감독이 선수에게 수신호를 하듯 메모를 보라는 시늉을 보냈다. 정수는 손바닥을 모아 반사하더니 문을 열고 들어와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초코바나 줘요.”

김민

*가작 수상작인 윤성훈씨의 는 940호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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