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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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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룡아’를 찾습니다

등록 2012-11-23 20:52 수정 2020-05-03 04:27

‘기적을 노래한다’는 국민 오디션 가 피날레를 향해 가고 있다. 빅3에 뽑힌 세 명의 인물 중 로이킴은 일찍부터 유력 우승 후보로 꼽히며 주목을 받았다. 회가 거듭할수록 그의 무대는 다양한 변신과 빠른 성장을 보여주며 호평을 얻고 있다. 로이킴이 지닌 스타성에는 그가 흘린 땀 외에도 ‘엄친아’로서 화려한 가족사가 있다. 막걸리 회사 회장 아버지, 출중한 미모의 어머니에 본인은 미국 유명 대학에 재학 중이라 한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로이킴을 치면 아버지 등 그의 가정환경과 관련한 기사들이 대거 뜬다.
본질은 조건의 양극화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엄친아’는 ‘엄마 친구의 아들’의 줄임말로 완벽한 남자·여자를 표현하는 말이다. 집안·학벌·외모 중에서도 완벽성의 제일의 조건은 집안이다. 집안이 좋은 경우 일정 수준의 학벌은 뒤따르게 마련이다. 연예인들 중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언론을 통해 ‘부모가 ○○기업 대표라더라’ 등이 인터넷에 뜨자 엄친아로 주가가 뛰는 경우가 적잖다.

엄친아에 대한 과도한 주목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가 비단 필자뿐만이 아니리라. 본인의 노력과 매력이 아니라 타고난 조건에 의해 평가받기 때문이다. 부모의 후광이라는 절대조건을 지닌 엄친아 앞에서 대다수 88만원 세대의 땀과 눈물은 보잘것없는 것이 되고 만다. 어쩌면 엄친아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88만원 세대가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의 다른 모습일지 모른다. 우리 사회가 계급사회, 양극화 사회임을 보여주는 어두운 단면이다. 이 시대 양극화의 본질은 결과의 양극화가 아니라 주어진 조건의 양극화이기 때문이다.

지난 7월 한겨레-참교육연구소에서 중학교 2학년생 1906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다. 이 결과에 따르면, 가난한 집의 공부 잘하는 아이가 잘사는 집의 공부 못하는 아이보다 만족도와 행복 모두 훨씬 낮았다. 가난한 집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절반 수준인 56.1%만이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고 응답한 반면, 공부를 못해도 잘사는 집의 아이들은 74.1%가 ‘현재의 삶에 만족’을 표했다. 과도한 사교육과 학교 공부가 아이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상반되는 결과였다. 아이들이 느끼는 삶의 만족도, 행복 정도, 심지어 꿈과 자신감의 크기마저 부모의 경제력에 좌우되고 있음을 보여줘서 안타까웠다. 상황이 이럴진대 아이들이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중2 아이들의 23.2%만이 ‘우리 사회가 공정하다’고 답했다.

이들의 비관적 인식은 조숙하고 리얼하다. 가난한 집에서 열심히 공부해 나름 명문대에 입학해도 등록금과 용돈을 버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다. 외국 여행이나 교환학생은 언감생심이다. 당연히 성적이나 스펙에서 처지게 된다. 이들의 소박한 꿈인 번듯한 직장에서 존엄하게 일할 수 있는 권리는 점점 멀어지고 그렇게 비정규직을 전전해야 하는 대다수 88만원 세대와 번듯한 직장에서 대접받으며 출발할 수 있는 5% 엄친아 사이의 격차는 더 벌어지게 된다.

진짜 정의란 무엇인가

엄친아가 대접받는 사회, 부모의 경제력이 아이들의 꿈도 미래도 좌우하는 사회는 불의하다. ‘비룡아’, 즉 ‘개천에서 난 용’ 같은 가난하지만 열심히 공부한 아이들이, 청년들이 인정받는 사회가 그립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다들 정의로운 사회를 역설한다. 한국 사회에서 정의 열풍이 분 영향도 있으리라. 진짜 정의로운 사회는 엄친아가 아니라 가난하지만 꿈이 있는 아이들, 청년들에게 열광하고 주목하는 사회다. 88만원 세대와 엄친아가 같은 크기의 꿈을 꿀 수 있는 사회, 같은 출발선에서 달리다가 그들이 흘린 땀에 비례해 관심과 갈채를 받는 사회 말이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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