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조선은 영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의를 시작했다. 협의 과정에서 주요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그 전해 조선 정부가 청(淸)과 ‘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며 청상(淸商)에게만 허용한 ‘도성 안에서 상점을 열 권리’였다. 조선 정부는 이 권리가 조선과 청의 ‘특수 관계’에 따른 것으로 다른 나라와 무관하다고 주장했으나, 영국은 ‘최혜국(最惠國) 대우’ 원칙에 따라 조선에 대한 청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맞섰다. 조선 정부는 승복할 수밖에 없었고, 곧바로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은 모든 나라가 같은 권리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이 조약으로 덕을 본 쪽은 일본 상인이었다. 그들은 조약의 변경 없이 ‘자동적으로’ 도성 안에 상주할 권리를 얻었다.
1883년 이전, 일인 이주자 청국인과 비슷
불법적이기는 했으나, 이전에도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 상인들이 있었다. 청이 임오군란을 진압하려고 대규모 병력을 서울에 주둔시켰을 때, 일본도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군대와 함께 군납 상인들을 파견했다. 이때 서울에 들어온 일본 상인들은 교도구미(協同組)와 오쿠라구미(大倉組)의 사원 10명 내외로, 일본공사관 부근에 점포를 짓고 공사관과 군대에 소요 물품을 공급했다. 다음해인 1883년 인천이 개항하자 일본 상인들이 다수 몰려왔는데, 이 중에는 몰래 서울로 이주하는 자들도 있었다. 일본 쪽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본 공사는 이들의 서울 이주를 막으려고 노력했다고 하는데, 이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불법이든 합법이든 서울 거주 일본인이 늘어나는 것은 조선에서 일본 세력을 키우는 데 유리했다.
조영조약이 체결되기 전에도 서울 거주 일본 민간인 수는 청국인과 맞먹을 정도였다. 박문국에 초빙된 이노우에 가쿠고로 일행, 기기국(機器局)에 초빙된 야나기타 가쓰사부로와 사기국(沙器局)에 초빙된 오가와 가타로 일행 등이 정부 승인 아래 서울에 거주했고, 일본인 노동자 70여 명이 일본공사관 신축 공사장에서 일하며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불법 체류자’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100명 이상이었을 것이다.
1882년 당시 일본공사관은 남산 밑, 지금의 예장동에 있었다. 일본 육군 소좌 하타노 기노이치가 지휘하는 중대 병력과 10여 명의 조달 상인도 그 주변에 거처를 마련했다. 남산 밑에 정착한 일본 상인들은 곧 조선 정부와도 거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교동에 새 공사관이 완공된 뒤에도 남산 밑을 떠나지 않았는데, 그들보다 늦게 서울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모두 이 주변에 거처를 마련한데다 그새 ‘단골’ 조선인들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인, 경멸의 뜻에도 ‘왜성대정’공식화
일본인들은 자신이 처음 ‘정착’한 이 동네를 왜장대(倭將臺) 또는 왜성대(倭城臺)라고 불렀다. 이 이름이 붙은 연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일본인들의 공적 기록은 모두 이를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사적(事跡)과 연관시켰다. 임진왜란 때 일본 장수 마스타 나카모리가 진을 친 곳이라 왜장대가 되었다는 설, 일본 군영 주변에 장(場)이 섰기 때문에 ‘왜장(倭場)터’라 불리다 왜장대가 되었다는 설, 일본군이 이곳에 성을 쌓았기 때문에 왜성대가 되었다는 설 등이다. 일본인들은 한때 ‘왜’(倭)라는 글자에 경멸의 뜻이 있다는 이유로 이 동네를 화장대(和將臺)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이 이 동네에 정착했을 때는 이미 임진왜란 때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이 무슨 수로 마스타 나카모리의 사적을 찾아냈는지도 알 수 없다. 이런 이름이 붙은 데는 아마 다른 연유가 있었던 듯하다.
궁궐과 마주 보는 남산 북사면의 고지대는 본래 민가가 들어설 수 없는 곳이었다. 궁궐을 내려다보는 곳에 집을 짓는 것은 왕권을 능멸하는 참월한 짓이었기 때문이다. 왜성대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도 빈터였다. ‘대’(臺)란 고지대에 펼쳐진 평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필운대·침류대·파총대·경무대 등이 모두 그런 뜻이다. 조선 후기 이 평지는 병사나 무과 지망생의 무예 연습장으로 쓰여 무예장이라는 뜻의 ‘예장’(藝場)으로 불렸다. 남산 기슭의 남촌이 무반(武班)의 집거지인데다 인근에 남소영(南小營) 등 군영(軍營)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 설이 더 믿을 만하다. 그러니 일본인들이 예장대를 왜장대로 잘못 알아듣고 견강부회 격으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사적과 연관시켰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본인들은 이 이름에 담긴 사적을 중시해 ‘일본인에 대한 경멸의 뜻’이 있음에도 1914년 경성부의 행정구역 명칭을 정할 때 왜성대정(倭城臺町)이라는 이름을 공식화했다.
갑신정변으로 교동에 새로 지은 공사관이 불타자, 일본은 다시 왜성대로 돌아와 녹천정(綠泉亭)이라는 정자가 있던 곳에 새 공사관을 지었다. 옛 중앙정보부 부지, 지금 서울유스호스텔 옆 ‘통감 관저 터’라는 표석이 서 있는 곳이다. 정치적 상징성으로야 서울 중심부에 진입하는 편이 나았지만, 자기들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의 위협에 상시적으로 노출되기보다는 이미 일본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에 공사관을 두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로써 일본공사관은 각국 공사관 중 궁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잡게 되었다.
일본인들의 본향, ‘본정’의 시작
부득이 외국인의 서울 거주를 전면 허용한 조선 정부는, 이들의 거주 구역을 제한할 필요를 느꼈다. 이들을 아무 곳에서나 조선인들과 섞여 살게 놓아두었다간 분쟁이 끊이지 않을뿐더러 풍속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터였다. 정부는 외국인의 거주지를 경복궁을 기준으로 해서 모두 개천 건너편에 배정했다. 일본인 거주지는 예장동 공사관을 기점으로 개천 방향으로 난 작은 길- 현재의 명동성당과 백병원 사잇길- 양쪽과 그 길 서쪽 끝에서 현 충무로1가 동쪽 끝까지의 구간으로 정했다. 이로써 서울 거주 일본인들의 본향(本鄕), 본정(本町·혼마치)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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