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을 해주십시오. 명령받고 싶습니다. 어른이 되고 보니 이제 아무도 명령 같은 거 해주지 않습니다. 네가 아무리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고 지나간 일을 돌아보지 않으며 살아도, 네 인생을 보살피는 것도 네가 알아서 할 일, 네 인생을 방치하는 것도 네가 알아서 할 일. 물론 나쁜 것을 염려해주는 고마운 이들이 있고, 좋은 것을 권해주는 다정한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염려와 권유로는 삶이 잘 바뀌지 않습니다.
“바싹바싹 말라가는 마음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스스로 물 주는 것을 게을리하고선// 나날이 까다로워져가는 것을/ 친구 탓으로 돌리지 마라/ 유연함을 잃은 것은 어느 쪽인가// 초조해져오는 것을/ 근친 탓으로 돌리지 마라/ 무엇이든 서툴렀던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초심이 사라져가는 것을/ 생활 탓으로 돌리지 마라/ 애당초 유약한 결심이 아니었던가.”
요새는 시인들도 명령 같은 거 잘 하지 않습니다. 도끼처럼 정신을 반으로 쪼개는 명령, 존재의 멱살을 잡고 벽에 밀어붙이는 명령. 그런데, 방금 인용한 것은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의 한 대목으로서, 이 시의 남은 부분은 이렇게 끝납니다. “잘못된 일체를/ 시대 탓으로 돌리지 마라/ 가까스로 빛을 발하는 존엄의 포기/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켜라/ 바보 같으니라고.”
아, 이런 명령은 몹시 좋습니다. 시인들이 명령을 잘 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천성이 겸손한 시인도 있고, 메시지가 강해져 시가 다치는 걸 원하지 않는 시인도 있고, 세상의 진실은 명령문이 될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고 믿는 현명한 시인도 있겠지요. 그런데 몇 년 동안 수십만 권이 팔린 어느 시선집을 보니 거기엔 드물게 명령들이 있더군요. 어쩌면 우리는 아무도 명령해주지 않는 삶이 무서워서 그런 책들에 의지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좀더 강하게 원해도 괜찮다/ 우리들은 아카이시(赤石)의 도미가 먹고 싶다고// 좀더 강하게 원해도 괜찮다/ 우리들은 몇 가지 종류의 잼이/ 언제나 식탁에 있어야 한다고// 좀더 강하게 원해도 괜찮다/ 우리들은 아침 햇빛이 비치는 밝은 주방을/ 갖고 싶다고// 닳아빠진 구두는 깨끗이 버리고/ 딱 들어맞는 소리 나는 새 구두의 감촉을/ 좀더 느끼고 싶다고.”
이바라기 노리코라는 이름은 처음 듣더라도, 이 시인의 시 중에서 한국에 특히 많이 알려진,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제목의 시를 알고 있는 분들은 꽤 있을 겁니다. 신이현이나 공선옥 같은 작가들이 장편소설의 제목으로 차용하기도 했지요. 방금 인용한 것은 ‘좀더 강하게’라는 시의 전반부입니다. 이건 명령의 매력 운운할 시는 아닌 것 같지만, 한숨이 나오는 멋진 후반부를 읽어보면, 또 그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어이 조그마한 시계집 주인이여/ 구부러진 등을 펴고 당신은 소리쳐도 괜찮다/ 올해도 결국 토요일의 장어는 맛보지 못했다고// 어이 조그마한 낚시도구집 주인이여/ 당신은 소리쳐도 괜찮다/ 나는 아직 이세(伊勢)의 바다도 보지 못했다고// 여인을 사귀고 싶으면 빼앗아도 괜찮다/ 남자를 사귀고 싶으면 빼앗아도 괜찮다// 아 우리들이/ 좀더 탐욕적으로 되지 않는 한/ 어떤 것도 시작되지는 않는다.”
이로써 우리는 두 가지 명제를 명령처럼 얻었습니다. 첫째,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켜라. 둘째, 탐욕적이지 않으면 어떤 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명제를 얻기 위해 시를 읽는 것이 시에 대한 온당한 대접은 아닐 겁니다. 시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소중한 것은 그게 아닐 테니까요. 그러나 가끔은 변하지 않는 내 인생이 답답해서 시인들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명령해주십시오. 명령받고 싶습니다.
(부기. 인용한 시들은 2012년 5월호에 상명대 일문과 양동국 교수의 번역으로 소개된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 1926~2006)의 시 11편 중에서 고른 것입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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