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청춘은 취조실에서 전기봉으로 두드려 맞으면서 갈가리 찢겼고, 수년 동안 갇혀 있던 감옥 안에, 여전히 낯선 나라의 낯선 방 안에,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기이한 운명 속에, 또 이제야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는 구덩이 속에 묻힌 채,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인가. 1970~80년대 독재정권 치하, 거리에 쏟아져나와 돌을 던졌던 청춘들의 이야기일까. 서글픈 역사의 정서는 비슷한 시기 지구 반대편까지 관통한 모양이다. 다음은 바로 뒤에 이어지는 문장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들 같은 청년들이 칠레에서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도 혁명가나 투쟁가를 부르지 않았다.”
노인이 되어 만난 혁명가들
소설 으로 잘 알려진 루이스 세풀베다의 최근작 (열린책들 펴냄)는 칠레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 군사독재와 탄압에 못 이겨 뿔뿔이 흩어진 혁명가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선출되고 민중은 칠레식 사회주의 국가 건설과 자유를 향한 열정으로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열정은 이내 닥쳐온 경제난으로 차츰 식어갔고, 1973년 9월11일 피노체트의 쿠데타는 여기에 찬물을 세게 끼얹었다. 대부분의 진보 인사들은 고문 등 철저한 탄압을 받았고, 무장투쟁을 벌이던 활동가들은 무자비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35년 뒤, 소설 속에서 노인의 얼굴로 다시 만난 혁명가들이 2000년대를 배경으로 뭉쳤다.
카초 살리나스는 피노체트 쿠데타 이후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해왔다. 그에게서 더 이상 30여 년 전 혁명가의 생동을 찾아볼 수 없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시내를 쏘다니다 공중전화를 만나면 멈춰서서 옛 사랑에게 전화를 거는 것, 그리고 벨기에 브뤼셀에 사는 아들과 밋밋한 안부를 주고받으려고 인터넷 카페에 들르는 것 정도였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였다. 인터넷 카페에서 온라인판 를 검색하려다가 실수로 광고란을 클릭하기 전까지는. 홍수처럼 쏟아지는 음란 광고물 사이에서 공지물 하나를 건져낸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ELN(1960~70년대 볼리비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마르크스레닌주의 게릴라 조직). 비스카차스 소조(小組). 연락 바람. 만약 비스카차스 소조 소속 엘레노(ELN 소속 칠레 사회주의당 산하 조직)면 응답하라. 흑표범.’
그렇게, 저마다의 길을 가고 있던 카초 살리나스, 롤로 가르멘디아, 루초 아란시비아 세 사람이 모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죽던 시절, 파시스트 조직의 파괴 공작에 맞서 함께 싸우던 친구들. 다시 만난 그들은 ‘그림자’라고 불리던 전설적인 혁명가 페드로 놀라스코의 지령에 따라 한 은행가가 숨겨둔 비자금을 찾아나선다.
한편 ‘그림자’ 페드로 놀라스코는 비 내리는 밤, 어두운 골목을 지나다 밀린 집세를 가지고 부부싸움을 하던 여자가 2층 창밖으로 집어던진 전축에 머리를 맞고 황당한 죽음을 맞는다. 전축을 던진 여자의 남편은 독일 베를린에서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뒤 세상에 대한 환멸을 이기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던 코코 아라베나. 페드로 놀라스코의 비극적 죽음은 오히려 코코 아라베나와 세 사람의 옛 혁명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지도자를 잃었지만 이 네 남자는 ‘그림자’가 남긴 보물을 찾는 일을 실행하기로 한다. 이렇게. “네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살도 많이 찌고 머리도 많이 벗어진데다 또 수염도 하얗게 세어버렸지만, 그들의 얼굴과 눈빛에선 여전히 과거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가르멘디아가 묻는다. “어때, 우리가 한번 해볼 텐가?” 희미한 역사의 그림자 같았던 이들이, 가르멘디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생동하기 시작했다.
엄혹한 세상에 돌을 던진 연대의 힘
이야기는 불법으로 강탈한 비자금을 분배한 내역이 적힌 장부까지 발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현장에 도착한 형사가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언론에 고위 인사들이 연루된 비자금 내역을 공개하며 마무리된다. 이렇게, 세상을 바꾸는 것은 힘있는 자들이 아닌 어쩌면 낮은 곳의 사람들, 나약한 듯하지만 사실은 강건한 이들의 연대에서 비롯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역사를 배경으로 허구를 그린 이 이야기는 지금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게다가 기사 들머리에 인용한 문장 외에 마치 우리의 이야기인 것 같아 섬뜩한 몇몇 문장 때문에 더욱더. “산티아고의 시내 중심가에서는 수많은 행인이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재촉한다.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좇는 감시카메라와 철장을 두른 초록색 버스 안에서 날카로운 눈매를 번득이는 경찰들, 은행과 기업의 출입을 통제하는 사설 경비 요원들 때문에 잔뜩 주눅 든 이들은 언제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있다. …어른들은 언제나 직장에서 잘릴지 모르는 불안과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고….”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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