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처음 만난 건 2005년 여름의 새벽이었다. 구릉 없이 평평한 방콕에서 두 달가량을 보낸 뒤라, 어스름을 뚫고 드러난 끄라비 산악의 기이한 형상은 타이도 아니고 지구도 아닌 완전히 다른 세계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10시간 넘게 야간 버스의 덜컹거리는 좌석에 시달렸음에도 그 순간 내 몸에는 넉넉한 열대의 기운이 돌았다.
아름다운 땅이었다. 물 입자를 힘껏 던지는 우람한 폭포, 화사하고 아름다운 해변, 맹그로브 숲을 끼고 흐르는 넓은 강이 있었다. 경관만 수려한 게 아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친절했고, 실수로 고른 음식까지 맛있었다. 가장 기뻤던 건 먼 이국에서 온 여행자를 대하는 끄라비의 자세였다. 한국에서 여름이라면 그 지역은 매일 서너 차례씩 폭우가 쏟아지는 우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끄라비에 머무는 닷새 동안 비가 한 번도 내리지 않았다.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맑고 쾌청했다. 그렇게 예정했던 닷새가 흘러 다른 지방으로 가는 야간 버스에 몸을 싣고 나서야 비로소 촉촉하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처럼 여러 사정들이 몹시 좋은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이후로도 여러 차례 끄라비를 방문했다. 오가는 길은 힘들었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다. 머무는 날이면 우기건 건기건 상관없이 맑았고, 떠나는 날이면 언제나 비가 내렸다. 한번은 비가 너무 많이 온 탓에 버스 출발이 2시간이나 지연된 적도 있었다. 그 뜨거운 비는 끄라비가 쏟는 작별의 눈물 같았다. 기억 속의 이 모든 일이 설령 기묘한 우연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몇 번이나 어김없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그 안에 숨은 일련의 암시를 뒤적이기 마련이다. 나는 끄라비가 나를 좋아하고, 그래서 내 일정을 보살피고, 사소한 느낌에 주의를 기울여주며, 그러다 종내는 총총히 돌아서는 모습에 괴로워하는 거라 생각해보았다. 그런 공상에 잠긴 채로 마침내 떠나가는 어느 국도 위에서 나는 끄덕끄덕 눈물을 닦는 끄라비의 어두운 하늘을 지켜보았다.
그것이 벌써 이태 전의 일이다. 이제 나는 한국에 있고, 겨울의 한국에 있고, 영하 5℃ 위로는 좀체 올라가지 않는 추위를 피해 건조한 방구석에 앉아, 습한 열대에 건설된 끄라비를 떠올린다. 그리고 내가 저를 그리워하는 만큼 저도 나를 그리워하고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왜냐하면 예닐곱 번에 걸친 체류 동안, 그것이 고작 사흘에 불과한 짧은 머무름이었건 한 달 가까운 긴 머무름이었건 상관없이, 침식된 석회암 언덕이 풍기는 아늑한 냄새며 길 잃을 때마다 적막의 갈림길 너머로 보석처럼 반짝이던 밀림, 강에 한 발씩 담근 채 길게 늘어선 반수상 목조 가옥들, 심지어 사기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저렴한 숙박비와 너무 많이 웃던 상인들까지 모두 더해, 돌이켜보면 그같이 여일한 평화로움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벌이는 짝사랑의 대가라 하기엔 지나치게 비싼 감각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오로지 상호 간의 깊은 유대와 섬세한 감정적 교류에 주어지는 선물이어서, 나로선 저 먼 인도차이나반도에 내 마음과 공명하는 몹시 인간적인 의지가 도시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찌 부인해볼 수 없는 것이다.
박형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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