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가운데 거대한 밭이 탄생할 모양이다. 오는 5월이면 시민들은 호미와 괭이를 들고 서울 용산구 이촌동 노들섬터로 모여들 터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2월6일 한강예술섬 터 6만818㎡ 가운데 2만여㎡를 도시농업공원으로 조성해 5월부터 시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오페라극장과 콘서트홀이란 건축구조물이 들어설 뻔한 자리에 상추며 딸기며 토마토가 터를 잡게 됐다. 6735억원의 건축비와 주변 교통 정비망 정리 비용까지 더해 1조원 가까이 집어삼킬 뻔한 이 땅은 앞으로 2년 동안 소소한 생산의 기운, 혹은 생명의 기운을 품게 됐다.
꽃을 들고 싸우다
이 소식을 듣는다면 기뻐 펄쩍 뛸 사내가 지구 반대편에 한 명 있다. (들녘 펴냄)을 쓴 영국의 리처드 레이놀즈다. 그는 ‘게릴라 가드너’다. 은밀하게, 그리고 예상치 못한 시점에 그는 한 줌 씨앗을 들고 나타나 삭막한 땅에 생명을 뿌린다. 전투지는 버려져 황폐화된 공유지나 황량하기 짝이 없는 콘크리트와 시멘트 사이다.
2004년까지 저자는 “좋든 싫든 법을 준수하고 사는” 평범한 런던 시민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지하보도와 번쩍거리는 쇼핑센터, 번잡한 자동차도로는 그에게 범법자가 되라고 내모는 것만 같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던가. 쌓이던 스트레스는 급기야 부글부글 끓기에 이르렀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반항심이 일었다. 그는 공적인 영역에 훼방을 놓기로 마음먹었다. ‘씨앗 폭탄’을 뿌려서. 한밤중, 리처드는 아무도 모르게 버려진 땅에 꽃씨를 심었다. 그 뒤로도 꾸준히 허가 없이 공유지에 꽃밭을 꾸미고 이를 방해하는 것이면 뭐든 맞서 싸웠다.
그는 ‘게릴라 가든’을 만든 뒤 웹사이트(www.guerrillagardening.org)를 열어 자신이 뿌린 씨앗이 얼마나 잘 성장했는지를 기록했다. 반응은 생각보다 폭발적이었다. 많은 이들이 꽃과 나무가 숨 쉬는 공간을 원했다. 땅은 누군가의 소유임이 분명하지만, 때로 버려진 듯 황폐하고 처량하게 내버려져 있었다. 특히 반듯하게 구획된 도심에는 그런 사각지대가 많았다. 땅은 누군가에게는 모자라지만, 누군가에게는 버려져 있는 모순의 공간이었다. 게릴라 가드너들은 전세계에서 씨앗 폭탄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모스크바 크렘린궁 바깥 풀밭에는 붉은 튤립이 심겼다. 보츠와나의 수도 가보로네 길가에는 피버 트리가 자리를 잡았다.
체 게바라는 “혁명과 선동의 씨앗을 뿌리고 파괴의 열매를 수확”한다고 썼다. 저자는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수확하는 행위가 혁명과 선동, 나아가 전쟁과 같다고 말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군수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은, 전쟁을 반대하던 군인이자 시인인 시그프리드 서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쟁은 남자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오.” 서순이 놀라 다시 묻자 처칠은 이렇게 자신의 말을 수정했다. “전쟁과 꽃밭 일이 그렇단 말이오.” 리처드는 처칠의 말에 동의한다며 이렇게 썼다. “(전쟁이든 가드닝이든) 우리는 통제하기 어려운 상대와 싸우게 되고, 주변의 모습을 바꿔놓고, 그러다 보면 스스로 흙투성이가 되기 마련”이다. 더불어 “전쟁과 꽃밭 일은 창조와 파괴라는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인간이 시간이 남으면 하는 일”이란다.
꽃밭 전투에 참여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꽃씨만 심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일한 명령을 따르는 군사 조직이 아니다. 게릴라 가드너들은 자유분방하게 여러 갈래로 나뉜다. 우선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려는 이들이다. 그들에겐 ‘꽃밭 본능’이 있다. ‘브리타 1198’(익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저자는 게릴라 가드너들의 성을 제외한 이름에 번호를 붙여 썼다)은 친구들과 웨스트 런던 2차선 도로 옆에 야생화밭을 일궜다(사진1). 꿋꿋이 생을 이어가는 이름없는 풀 한 포기에도 마음 놓지 못하는 게릴라 가드너도 있다. ‘헬렌 1106’은 보도블록 틈새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한 줄기 개쑥갓을 위해 작은 울타리를 만들어줬다(사진2). ‘폴 1109’는 동성애자들을 향해 공격이 벌어진 장소를 표시하려고 그곳에 팬지를 심기 시작했다(팬지는 영어권에서 ‘게이’를 상징하는 은어로 쓰인다). 2007년 그는, 3년 전 동성애자 데이비드 멀리가 피살된 장소인 런던 사우스뱅크의 퀸스워크 거리에 팬지를 심었다(사진3). 캐나다 토론토의 한 게릴라 가드너는 씨를 뿌리기보다는 기존에 자리잡은 생명이 더 잘 살아가길 응원했다. 도심 구석에서 씩씩하게 자라나는 채송화에 물을 주도록 독려하는 작은 피켓을 만들어 걸어뒀다(사진4). 이들 외에도 게릴라 가드닝은 먹거리 투쟁으로 변하기도 하고, 때로는 산업화한 농업에 기대지 않고도 생활이 지속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위로 변신한다.
이것은 패자 없는 전쟁
저자는 이 ‘전쟁’을 사실 승패가 갈리지 않는 윈윈 전쟁이라고 말한다. 버려진 공공용지를 골라서 꽃밭으로 만드는 싸움, 늘 모자라면서 버려지기도 하는 공간을 상대로 싸우는 도전을 통해 남은 것은 승리뿐이었단다. 꽃밭을 꾸미고 이를 지속적으로 돌보는 이도, 꽃과 나무 사이에서 뭉쳐지기 시작한 공동체도, 황폐함에서 비옥함으로 돌아선 땅도 모두가 승자라는 것이다. 그는 더 많은 게릴라 가드너들이 이 전투에 참가하길 바란다. 다만 이 운동이 상업적 이익을 위해 오용되거나 홍보되지 않기를 바라며(때때로 그들이 꾸민 꽃밭 덕에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는 ‘부작용’이 발생한단다). 그는 게릴라 가드닝이 그저 “물질과 신속함에 매몰된 우리 의식과 삶의 패턴을 변환하는 운동”이길 바란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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