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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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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사랑해보라, 그러면 안다”

작가를 넘어 사상가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최인훈의 에세이·비평을 비롯해 근작을 모아 엮은 <바다의 편지>
등록 2012-02-11 11:04 수정 2020-05-03 04:26

소설가 최인훈이 펼친 지성의 광장을 한 권의 책에서 만나게 됐다. 우리는 그를, 언제나 그 이름을 수식하는 ‘광장’의 작가로 기억한다. 대표작 ‘광장’은 2004년 국내 문인들이 뽑은 ‘최고의 소설’이었다. 사실 대표작은 한 편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문학성은 등으로 이어진다. 그는 소설가에 머물지만은 않는다. 희곡집 등을 펴낸 극작가이기도 하고, 산문집 을 펴낸 에세이스트 혹은 독창적 사상가이기도 하다.

최근 출간된 (삼인 펴냄)는 소설가 최인훈의 넓은 외연을 보여주는 글 모음집이다. 책을 엮은 오인영 고려대 교수는 “최인훈을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만이 아니라 ‘지성’으로서, 특히 역사에 대한 깊고 넓은 통찰을 제공하는 ‘사상가’로서 읽고 싶은 욕망의 산물”로서 이 책을 펴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이번 책에 실린 최인훈의 텍스트는 주로 시론, 시평, 문학과 예술의 기원과 본질을 탐구한 예술사론 등 에세이나 비평이 많다. 엮은이가 보기에 이 글들은 “인류 문명, 근대 세계, 한국 사회에 대하여, 소설에 비해 더 논리 정합적이고 간결하면서도 집중적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1~3부까지는 기존에 발표된 작품 가운데 ‘작가’ 최인훈을 넘어 ‘사상가’ 최인훈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골라 엮었고, 4부에는 표제작인 ‘바다의 편지’를 실었다. 2003년 에 발표한 뒤 단행본에는 최초로 수록했다.

유려하고 진지한 통찰

‘문명 진화의 길- 문명 DNA의 힘과 흠’이라 제목 붙인 1부에서는 인류 문명의 역사적 진화 과정에 대한 최인훈의 거시적 통찰력이 드러난 글들이 수록돼 있다. 오인영 교수가 ‘최인훈표’ 사유와 글의 밀도가 잘 들어 있는 대표작이라 꼽은 ‘길에 관한 명상’이 1부에 실렸다. 작가는 ‘길’이라는 우리말의 용법이 확대돼온 과정을 탐사하며 ‘길’ 안에 “인간 의식이 세계를 파악하는 중요한 인식 형식이 모두 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길’이라는 하나의 단어를 두고 ‘(짐승) 길들이기-기르기-기술’이라는 의미로 개념을 확대하거나, 인간 외부의 사물인 길이 내면화돼 말이 되고, 말이 다시 지식(앎·진리)이 되는 과정을 유려한 방식으로 설명했다. 인간이 지나온 역사적 발자취를 ‘길’로 설명하기도 했는데, ‘자연의 길’ ‘지식의 길’ ‘환상의 길’로 구분했다.

» 소설가를 넘어 독창적 사상가이기도 한 최인훈이 일궈온 문학적 성과와 사유의 맥락은 깊고도 넓다. <한겨레> 이정아

» 소설가를 넘어 독창적 사상가이기도 한 최인훈이 일궈온 문학적 성과와 사유의 맥락은 깊고도 넓다. <한겨레> 이정아

2부 ‘근대 세계의 길- 문명 DNA의 빛과 어둠’에서는 현실사회주의 몰락, 역사의 종언, 미국의 세계 지배 형태, 현대 문명의 모순 등 굵직한 문제들을 다뤘다. ‘완전한 개인이 되는 사회’를 보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말이 있다. 중요한 장기가 병들었든, 손끝에 가시가 하나 박히든 인간은 똑같이 사로잡힌다. …그러나 어떤 국가·사회·제국도 그렇게 순수한 육체의 조화로운 통일과 같은 유기성은 없다는 데 문명의 모순이 있다. 가령 어떤 사회에는 ‘천국이 따로 없다’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기본적인 물질적·정신적 보장조차 못 받는 사람들이 공존한다. …그 부분을 어떻게, 어느 정도 아파하느냐 하는 것이 인류 역사 발전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

3부 ‘한국 역사의 길- 문명 DNA의 앎과 꿈’에서 최인훈의 글들은 우리의 과제란 “인간이 되는 일”이라고 한마디로 요약한다. ‘돈과 행복’에서 돈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문학을 끌어들인 점이 흥미롭다 “우리는 많은 좋은 소설가들을 가지고 있다.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사람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면 모든 문제는, 따라서 돈의 문제도 해결된다. …사회의 모든 악은 사람들이 어른이 되면서 문학을 접하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문학의 기쁨을 모르면 사회는 썩고 사람은 간사스러워진다. 문학을 통하여 사람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기 손톱눈의 백(白) 속에 심연의 어지러움을 보는 감각을 문학은 길러준다. 그런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시를 만들었고 우주의 공간 속으로 폭탄을 쏘아 보내는 생명의 꿈틀거림을 보여주었다. 또 그런 것을 아는 사람은 남을 속이거나 치사스러운 짓을 하지 않는다. …문학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생명에 취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런 힘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사회는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목숨들의 아름다운 잔치일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잔치다. 기름진 잔치가 아니다. …문학을 사랑해보기를 권한다. 그러면 안다.”

‘바다의 편지- 사고 실험으로서의 문학’이란 문패를 단 4부에는 단편소설 ‘바다의 편지’를 실었다. 오인영 교수는 이 작품에서 “현재 최인훈의 ‘사유의 지평과 좌표’를 단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소설은 “우주와 지구의 자손들 가운데 하나인 인간(최인훈)이 생명의 시원에서부터 지금까지의 무수한 ‘조상들’을 자기 한 몸에 빙의해서 쓴” 것이다. 시적 언어로 가득한 소설에 대해 엮은이는 “인간(주체)과 자연(대상), 개체(특수)와 계통(보편), 문학과 과학, 도리와 물리, 나와 타자 사이의 역사와 경계를 넘나드는” “소통과 융합의 사고실험”이라고 표현했다.

살아 있는 사유, 살아 있는 문장들

책은 문학비평가가 아닌 역사학자로서 오인영 교수가 공들여 쓴 서문과 해제를 포함해 오랜 통찰이 담긴 글들을 600여 쪽 분량으로 꾸려졌다. 한숨에 후루룩 읽기보다는 곁에 두고 몽매한 순간들을 깨치는 데 사용하길 권한다. 더불어 어렵지 않게 쓰인 문장들은 하나 쓸모없는 것이 없다. 유기적으로 연결돼 문단을 이루다 보니 부분만 툭 잘라내 지면에 옮겨 쓰는 것이 쉽지 않다. 하나하나 생명을 가진 문장들과 거기에 깃든 사유를 천천히 탐하다 보면 길고 긴 겨울밤도 어느덧 지나 있지 않을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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