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영 감독의 오랜만의 연출 복귀작인 의 진짜 힘은 영화를 보고 나면 실제 사건의 전후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좀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영화 속에서 문성근이 연기하는 판사가 잘 쓰는 말대로 ‘실체적 사안’에 대해 종합적으로 알려주는 데는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무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 대해 제대로 알려면 그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듯하다. 영화는 스토리도 풀어내야 하고 주인공의 매력도 전해줘야 하고 마지막에 적당한 정서적 카타르시스도 마련해줘야 하고 관객에게 내 인생의 영화로 남을 만한 인상적인 장면 서너 개쯤도 남겨줘야 한다. 지식을 전달하기엔 너무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매체다. 영화를 통한 공감과 이입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전환을 꾀할 수 있을까 회의한 영화예술가는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
실화의 픽션화에 담긴 서로 다른 미학과 윤리
2011년 한국 영화계에 뚜렷한 흐름을 형성한, (1994년을 배경으로 음모론을 펼친 에서 소설을 영화화한 와 최동원과 선동열이라는 전설적 투수의 맞대결을 다룬 과 곧 개봉할 에 이르기까지) 실화를 소재로 한 극영화들에선 분명히 영화 속 사건을 박진감 있게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 있다. 와 같은 영화가 순전히 픽션이었다면 그만한 사회적 파장은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회적 파장은 실화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인식 관행에 기대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리얼리티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에 관한 윤리적 고민이 뒤따른다. 한 예로 와 비슷한 소재를 다룬 독립영화 은 2011년 뒤늦게 개봉했으나 아무런 관객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 영화는 장애인 여성 주인공의 시점을 취하고 그녀가 보는 현실을 따라가며 선과 악을 섣불리 판단하기보다는 그녀가 느끼는 삶의 ‘숨’을 제대로 느껴보라고 관객에게 권유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관객의 취향에 따라서는 보는 것이 좀 힘들고 답답하다. 그렇지만 윤리적으로는 과장 섞인 수식이 전혀 없는 정직한 영화이기도 하다.
실제 벌어진 일을 픽션화할 때 감독이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에 따라 미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곱씹어볼 만한 여운이 생긴다. 로 돌아가보자. 주인공의 실제 모델은 성균관대 수학과에 있었던 김경호 교수다. 그는 대학 입시 출제 문제가 오류라는 걸 밝히자고 주장했다가 같은 과 교수들과 불화를 일으키고 학교 당국에 찍혀 재임용에 탈락했다. 법정에서도 학교 편을 들자 그는 부당한 판결을 내린 판사에게 항의해 석궁을 들고 찾아가 협박했다. 알려진 사실은 여기까지다. 이 사건의 실체를 파헤친 서형이란 필명의 작가가 이란 르포르타주를 썼고, 정지영 감독은 그것에 기초해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의 초점은 두 차례 담당 판사가 바뀌며 진행되는 재판정 장면에 모아져 있다. 법정 드라마의 형식에 주인공 김경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삽화가 추가되는데, 이 부분은 좀 전형적이다. 김경호를 변론하는 변호사와 사건을 취재하는 정의감 넘치는 기자 사이에 남녀 관계로까진 발전하지 않는 희미한 우정과 로맨스의 플롯이 끼어들지만 배우들의 연기도 범상하고 전개 방식이 좀 전형적이라서 심심했다.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 김경호의 캐릭터인데, 이 지점이 의 압권이다. 모든 걸 꼼꼼히 따지고 드는 이 희대의 캐릭터는 법정에서 아예 변호사를 제쳐두고 자신이 직접 판사와 검사를 심문하려 든다. 너무 고지식하고 일방적이어서 그에게 우호적인 주변 사람조차 질리게 만드는 이 주인공의 캐릭터가 압권이다. 이런 주인공 앞에서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판사들조차 쩔쩔맨다. 잘못된 것에 항의하지 않는 게 만성화된 우리의 비민주적이고 굴종적인 반민주적 시민의 품성에 김경호 캐릭터는 강력하게 한 방 먹인다.
각성과 분노의 결정적 차이
정지영 감독은 (아무리 국민배우 안성기가 친근감을 주게 연기하고 있어도) 이 주인공의 캐릭터를 영웅화하지 않는다. 나는 이 캐릭터가 주는 거리감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의 윤리적 태도라고 봤다. 그는 꼬장꼬장하며 법조문의 항목을 꼬박꼬박 인용해 판사를 공격할 수 있는 부지런한 지식인이다. 자신에 대한 신뢰가 너무 강한 독불장군이며 주변 인물의 사소한 허물조차도 용납하지 않는 그런 인물이다. 이런 사람을 개인적으로 좋아하기란 힘들다. 일종의 작은 괴물인데 그런 그를 둘러싼 사법부의 권력자들은 겉으로는 인간적인 얼굴을 한 큰 괴물들이다. 두 번째 판사로 나온 문성근의 소름 끼치도록 재수 없는 재판관 연기도 좋았지만 그 전의 재판에서 판사로 나온 이경영의 연기가 특히 좋았다. 관행을 따라 재판하려 했으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권력자의 모습을 몽롱한 표정으로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이런 캐릭터 묘사, 요컨대 인간적으로 선악을 구분하는 것에 괄호를 치고 거리감을 둔 것이 이 지향하는 리얼리티의 묘사 윤리에 적합한 태도로 보였다.
세상을 선과 악의 투쟁으로 보는 것은 오래된 신화·전설·민담에서부터 현대의 영화와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거부할 수 없는 틀이다. 누구 눈으로,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다의적인 리얼리티를 절대 선과 절대 악으로 나누고 그 사이에 분투하는 영웅의 이미지를 끼워넣는 것이 대중서사의 관행이다. 2011년 가을 최대 화제작이던 는 절묘하게 그 균형을 맞추려 한 영화였다. 황동혁 감독은 소름 끼치도록 불행한 사건을 봐야 하는 관객을 위해 정의감 넘치는 남녀 주인공을 배치하고 선의 집행을 위해 싸우는 픽션을 가미해 후반부에 몰아넣었다. 실제로 악을 물리친 사건은 아니지만 물리칠 수도 있다는 승리에의 환상, 의지를 이 영화는 심어주었다. 영화주간지 에 기고한 글에서 평론가 안시환은 이 영화의 그런 장치를 두고 ‘너무 뜨겁지는 아니한가’라고 의문부호를 달기도 했다.
에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장애학생들의 현실에 분노하는 강인호(공유)와 서유진(정유미)의 태도는 시종일관 강조되는 영화 속 소년·소녀들을 보는 관객인 우리의 시점과 겹쳐진다. 부도덕한 현실과 그 희생자들을 보며 분노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다. 그들과 함께 고통을 견디는 것은 그와 달리 쉽지 않다. 고통에의 동참은 시각적 경험의 나눔을 통해 힘겹게 이뤄진다. 본다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이 경우에는 불쾌이며 나아가 고통이다. 정의를 지향하는 강인호의 캐릭터는 우리의 윤리적 각성과 고통에 자그마한 탈출구를 마련해준다. 대중영화로서 이런 장치는 그 자체로 비난받을 것이 못 된다. 그렇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법정의 정당한 판결을 받지 못한 채 분노한 한 등장인물이 합의로 풀려난 가해자를 찾아가는 대목은 더 큰 윤리적 간극을 발생시킨다. 이 대목에 이르러 관객의 도덕적 공분은 더욱 고조된다. 이 도덕적 공분과 윤리적 각성은 좀 다르다. 도덕적 공분은 현실에 대한 우리의 우월한 판관의 위치를 확인시키지만 윤리적 각성은 현실에 대한 우리의 회의를 증식시킨다.
예술가의 필터에 잡힌 ‘진실’
우리가 실화에 기초한 영화에서 원하는 것은 진실인가, 감동인가. 그 둘 다일 것이다. 하지만 그 감동이라는 것이 우리가 뭔가를 알아냈다고 하는 지식의 획득에서 오는 안도감과 주인공들 편을 들어줬다고 하는 도덕적 우월감에 기초한 감정의 단순 조건반사라면 어찌할 것인가. 이건 영화로 보는 또 하나의 감정소비 패턴인가, 아니면 고통과 쾌락을 동반하는 참여에의 경험인가. 20세기 모더니스트들은 카프카의 소설이 나온 이래 현실에 묻은 진실을 온전히 다 파악할 수 없다고 하는, 작품은 예술가의 주관적 필터에 잡힌 진실의 한 조각이라고 하는 명제를 미학화했다.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현실 앞에서 회의할 수 있는 능력이 커진다면 사회는 그만큼 성숙해지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 날로 팍팍해지고 부조리해지는 우리 현실이다. 영화는 진실도 담아야 하고 위로도 해줘야 한다. 그 균형감의 경계를 어떻게 정할지에 관해 적어도 최근 한국 영화들은 나름의 답을 내놓았다. 의 결말은 현실에서와 같이 주인공의 패소로 끝난다. 그런데도 화면은 경쾌하다. 여전히 권력에 항의하고 맞서는 주인공을 보여주며 끝나기 때문이다. 영화는 위풍당당한 주인공을 통해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요즘 유행하는 와 비슷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그러니까 ‘쫄지 마’.
김영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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