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후에 광선이 남원의 장인가로 돌아갔다. 광연과 어린 누이동생 봉례가 울어 눈물이 줄줄 흐른다. 형제간에 지극한 우애의 정이 어려서부터 나타나니 우리 집안의 기맥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당세의 명문장가인 유희춘(1513~77)이 쓴 에 나오는 구절이다. 광선은 유희춘의 손자로 그가 처가에 간다고 하니 동생들이 슬피 운다. 처가에 다녀온다는데 우는 이유가 무엇일까?
며느리 아닌 딸로서의 정체성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으로 재직 중인 이순구씨가 쓴 (너머북스 펴냄)을 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광선은 당시 전북 남원의 김장 집안으로 장가를 들었는데, 혼인을 하고 4일 만에 집을 찾았다가 다시 장인 집으로 돌아가고, 한 달쯤 뒤에 두 번째로 본가에 와서 40여 일을 머물다 다시 장인 집으로 돌아갔다. 앞의 구절에 나오는 대목은 두 번째로 장인 집으로 돌아가는 시점이다. 동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다시 못 볼 듯 아쉬워하는 이유는 광선이 처가로 완전히 살러 가기 때문이었다. 유희춘은 ‘남원의 장인가로 돌아갔다’는 표현을 ‘귀남원장가’(歸南原丈家)라고 썼다. 저자는 여기서 ‘귀’(歸)를 단순히 갔다는 표현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중국에서 ‘귀’는 여자가 본래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인 시집으로 간다는 의미로 쓰이는데, 조선에서는 남자에게 적용했다. 조선의 혼인 습속은 대개 여자 집에서 혼인식을 하고 여자는 여자 집에 그대로 머물고 남자가 자신의 집과 처가를 오가거나 아예 처가에서 지냈다. 장가를 ‘간다’는 표현이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의 제도가 곧 선진적인 것이며, 중국처럼 되기를 바랐던 조선의 관리들은 혼인에서 외가를 중히 여기는 것을 비판했다. 그러나 남자가 장가드는 혼속은 오히려 양반가에서 더 확고했단다. 조선은 중기까지 남자가 여자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고 신랑이 본가와 처가를 오가며 생활하는 형태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풍습이 성행했다.
저자는 조선시대 여성이 친정과 긴밀했다는 흔적을 에서도 찾는다. 계축년(1613년, 광해군 5)에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내치고 계모 인목대비를 폐위해 서궁에 가두었다. 는 당시 사건을 인목대비의 관점에서 쓴 책인데, 그는 광해군에게 이런 말을 한다. “대군(영창대군)으로 말미암아 이런 화가 부모와 동생에게 미치니 어찌 차마 들을 수만 있으리까? 내 머리를 베어서 표를 보이니 대군을 데려다가 아무렇게나 처치하고 아버님과 동생을 놓아주옵소서.” 영창대군을 지키는 것이 이미 틀렸다고 생각하고 훗날을 생각해서 한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아들 영창대군을 내놓을 테니 친정을 보호해달라는 인목대비의 제안은 조금 섬뜩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목대비가 살던 17세기는 남귀여가혼이 점차 줄어들고 남자 집 거주가 늘어나는 시점이었지만, 여전히 (어쩌면 모성애보다도 강한) 친정에 대한 소속감, 딸로서의 정체성이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그토록 많은 역사 속 유교적 현모양처들은 어디로 갔을까. 우선, 지금까지 좋은 아내, 훌륭한 어머니의 표상으로 여겨지는 신사임당부터가 실제로는 개인적 성향이 현모양처와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신사임당(1504~51)은 16세기 인물인데, 17세기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시집살이를 하지도 않고, 딸도 제사를 지내고 재산도 똑같이 상속받아서 여자들은 딸로서의 정체성이 며느리로서의 정체성보다 더 강했다. 율곡의 을 보면 신사임당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뿐 아니라 본인의 재능과 기호에 몰두한 사람으로 비친다. 반면 자녀 교육과 관련해서는 “자녀가 잘못이 있으면 훈계를 하였으며…”라는 딱 한 줄만 묘사돼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신사임당이 유교적으로 훌륭한 어머니로 전해지는 이유는 송시열이 신사임당의 그림에 찬사를 보내며 “오행의 정수를 얻고 원기의 융화를 모아… 마땅히 율곡을 낳으실 만하다”라는 다분히 성리학적인 품평을 한 탓이다. 신사임당은 38년간 친정이 있는 강원도 강릉에서 살았고 서울에서는 10년 정도 살았다고 한다. 저자는 신사임당이 유교적 전통의 현모양처라기보다는 21세기가 요구하는 이상적 어머니상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재능에 집중하며 율곡이나 큰딸 매창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도록 여유를 주는, 열린 자세의 현명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부부가 사이좋았던 이유
흔히 가부장적 사회로 인식되는 조선에서 부부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다는 대목 또한 흥미롭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사회 운영의 상당 부분을 가족에 일임한 국가가 있었다. 가족의 안정과 부부 화합은 조선의 절대적 과제였다. 저자는 혼인이 개인 의지가 아니라 집안의 이해관계에 따라, 유사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들끼리 이뤄졌다는 점도 이유였으리라 말한다. 저자가 꼽은 이유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조선시대 부부가 동거 비율이 낮았고, 이것이 부부 갈등의 첨예화를 막는 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조선은 중기까지 남귀여가혼에 따라 남자가 처가와 본가를 오가는 생활을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부부가 실제 만나는 날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배를 가거나 외직에 파견되는 경우까지 따지면 떨어져 있는 시간은 더욱 길어진다. 실제 의 유희춘은 40년 동안 부부 생활을 했지만 실제 동거 기간은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더불어 조선시대 양반가는 시간의 분리뿐만 아니라 공간적 분리도 시도했는데, 안방과 사랑방의 구분이 그렇다. 오늘날처럼 부부가 한 공간에 밀착해 지내는 문화는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책에는 이들 이야기 외에도 재산을 두고 올케와 주먹다짐을 한 안씨 부인, 족보에서 ‘서’(庶)를 빼려고 부도덕한 일도 서슴지 않았던 서자 노수 등 가족과 연관한 조선의 사연들이 담겼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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