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희망을 보았다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 중 주목할만한 작지만 센 이야기들… <돼지의 왕> <물고기> <로맨스 조>의 감독과 대화를 나누다

<돼지의 왕>. BIFF 제공

<물고기>. BIFF 제공

<로맨스 조>. BIFF 제공

다국적 거대 영화들 사이에서 작은 영화들은 마이너리티도, 아웃사이더도 아니었다. 지난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저예산 3D 입체영화 , 초단기 제작 애니메이션 , 5천만원에 제작된 등 작은 영화들이 이룬 장르적 성취가 주목받았다. 대형 영화에 맞서 작은 영화가 살아남는 전략은 또렷한 주제의식이다. 만듦새는 투박할지 몰라도 관객에게 전해진 감독의 목소리는 울림이 크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애초 영화에 끌린 것은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화에 대한 첫사랑을 일깨우는 세 작품의 신인 감독들을 만나보았다.

연상호 감독

“이 정부에선 이런 이야기 겁이 났어요”

연상호 감독. BIFF 제공

을 본 관객도 겁이 났다. “이곳은 얼음처럼 차가운 아스팔트와 그보다 더 차가운 육신이 뒹구는 세상이다.” 단순한 진리와 대결을 넘어선 세상, 은 우리가 말하고 싶지 않았던, 말할 수 없었던 진실을 그려낸 성인 애니메이션이다.

은 죽음에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맺는 애니메이션이다. 경민이와 철이의 자살, 그 원인을 따라 15년 전의 이야기를 좇아간다. 경민이와 종석이는 수컷들의 세상에서 늘상 당하고 사는 힘없는 존재였다. 남자 중학교 1학년 교실 계급 분포는 피라미드형이다. 폭력을 등에 업고, 선생님 눈에도 나지 않는 소수가 있고 나머지는 모두 수드라 천민 같은 존재들이다. 소변을 끼얹고 바지를 잡아 찢어도 입도 달싹 못하는 다수의 ‘살찐 돼지’들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저항을 선동하는가? 문제는 돼지들의 저항은 결국 돼지들 자신을 갈가리 찢어놓았다는 점이다. “기득권 계급에 대한 영화는 꽤 많이 나왔지만 그 밑의 계급을 내밀하게 보는 영화는 없는 듯해요. 전복이 안 되는 이유는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에요. 위로 올라갈수록 누가 더 많이 가졌는지 누가 더 힘이 세졌는지만 중요한데, 당하는 계급은 항상 복잡해요. 밑으로 내려갈수록 복잡해지는 거죠.” 기득권을 겨눴던 철이의 칼은 결국 연대하지 않는 돼지들의 숨통을 끊어놓는다.

<돼지의 왕. BIFF 제공

연상호 감독은 이 이야기를 군대에서 쓰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 남자들이 밟는 폭력 교실 최고 과정을 거치며 쓰기 시작한 셈이다. 어느 날 악몽을 꾸다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육군수첩 10쪽에 꿈에서 본 철이의 이야기를 옮겨 썼다. 창작 단계에선 중학생 시절 일화는 물론 일일이 중학교 졸업 앨범과 이름을 확인하며 등장인물들을 만들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악몽 속에 존재하는 실화다. “나 같은 전형적인 학원폭력물을 뒤집고 싶었어요. 눈에 보이는 폭력 계급을 설정해서 장르영화를 보여주다 뒷부분부터 그것을 깨부수는 걸 보여주자는 것이 목표였죠.” 돼지들의 우상, 돼지들의 왕인 철이는 괴물이 되어서라도 그들에게 저항하겠다며 옥상에서 뛰어내리지만 “얼음처럼 차가운 아스팔트와 그보다 더 차가운 육신이 뒹구는 세상”은 그대로다. 감독은 철이가 뛰어내리는 옥상이 ‘부엉이 바위’를 닮았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은 한국 성인 애니메이션의 존재 증명이다. 실화영화가 ‘분노의 도가니’로 사람들을 끌어들일 동안, 거칠고 직설적인 언어로 빚어낸 애니메이션의 장르적 쾌감은 피지배 계급의 복잡다단한 싸움의 현장을 열었다. 1억2천만원의 제작비와 1년의 제작 기간으로 ‘미션 임파서블’을 이뤄낸 연 감독은 “시나리오의 주제의식을 십분 존중하는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되돌아본다. 이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NETPAC)과 한국영화감독조합상 감독상, 무비꼴라쥬상 등 3개 상을 받았다.

<hr> 박홍민 감독“진도 씻김굿 영감 3D 영화로 푼 삶과 죽음”

박홍민 감독. BIFF 제공

‘아바타’에 홀린 우리는 왜 입체영화가 필요한지를 잊었더랬다. 는 관객을 마법 카펫에 태워 환상의 세계로 들여보내는 대신, 한 남자의 머릿속으로 불러들인다. 대학교수인 전혁은 흥신소 직원과 함께 집을 나간 부인을 찾아나선다. 전남 진도에서 무당이 되었다는 부인을 찾아 가사도행 배를 타는 순간 과거와 현재, 현실과 비현실은 뒤죽박죽이 돼버린다. 어떻게든 부인을 끌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전혁은 왜 다들 그를 모른 체하는지, “그만 돌아댕기라”던 가겟집 할머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왜 자신은 이곳에서 맴만 돌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관객은 관객대로 왜 갑자기 기억을 잃은 낚시꾼들이 나타나는지 알지 못한다. “속았다. …나를 죽여줘”라고 말하는 물고기는 또 누구인지도. 그저 물귀신에게 끌려들어가듯 비의적인 분위기에 빠질 뿐이다. 영화 중반 물에 빠져 죽은 전혁의 주검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것은 수수께끼의 해결이 아니라 다른 수수께끼의 시작일 뿐이다. 전혁은 언제 죽었는가. 흥신소 직원과 낚시꾼들은 누구인가. 산 자와 죽은 자에게 한 팔씩 잡힌 아내 지연은 어떻게 할 것인가.

박홍민 감독은 2008년 진도 씻김굿이라는 소재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 한 편을 만들어냈다. “가사도를 몇 차례 드나들며 씻김굿 광경을 보다가 욕망과 아집에 찬 남자와 그 반대의 길을 가는 여자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이 독특한 이야기를 입체로 만들어내려면 결단이 필요했다. 3년 동안 박홍민 감독은 독학으로 3D를 공부했고, 그 덕에 입체 자막도 혼자서 입힐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수많은 서사와 장치들도 그때 보태지고 다듬어졌다. 시나리오가 완성된 지 2년 만에 동아방송 등에서 받아낸 7천만원 지원금으로 독립 3D영화를 완성했다.

<물고기>. BIFF 제공

박 감독은 “입체영화는 폭력적인 매체”라고 거듭 말한다. “입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감독에게 에서 입체의 구실은 분명하다. 관객의 시선을 완전히 통제하는 입체효과를 통해 관객의 심리를 조종하고 감독의 의도를 드러낸다. 불편하리만큼 튀어나온 전혁의 자동차 창문은 관객의 접근을 거부한다는 뜻이리라. 반대로 폐가의 창틀과 문틀은 불안하게 노출된 전혁의 머릿속이다. 감독은 입체효과를 이용해 시점을 뒤섞고 시선을 통제한다. “창틀이 죽은 자를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지기를 바랐어요. 입체는 보고 싶은 기억을 만들어내는데, 폐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게 전혁의 기억인지 흥신소의 기억인지 지연의 기억인지 뒤섞이기를 바랐습니다.”

는 제한된 자원을 더할 나위 없이 영리하게 이용한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감독은 값비싼 특수효과 대신 전혁과 지현의 숨소리가 섞여드는 음향효과, 수면 위에 비친 세상의 반대 모습 등 저승과 이승에 대한 은유를 곳곳에 심어놓았다. “전혁이 홀로 우는 장면에서 배경화면이 어지럽게 깨지는데 클로즈업이 어려운 저예산 입체영화의 한계라고 하죠. 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이 남자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배경이 어지러운 것이 되레 맞다고 생각했어요.” “3D는 미끼상품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란다. 박홍민 감독은 이제 30살이다. 한국 입체영화, 여기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hr> 이광국 감독

“그놈의 이야기 좀 그만하려고요”

이광국 감독. BIFF 제공

에는 이야기를 탐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소문 때문에 자살한 여배우의 실제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들, 이야깃거리가 궁한 영화감독, 엄마의 이야기를 찾아나선 소년. 다방 레지는 “사람들마다 꼭 필요한 이야기가 있걸랑” 하며 커피와 함께 이곳저곳으로 이야기를 퍼나른다. 영화 속 다방 레지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실 속에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과 이야기 속 사람들이 매트릭스처럼 엮인다.

이광국 감독은 “영화 속 감독처럼 나도 영화는 만들어야 하는데 마땅히 할 이야기를 찾지 못하던 2008년 겨울, 카페에 앉아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다가 시나리오의 초고를 완성했다”고 한다. 는 수다한 이야기로 이야기에 대한 기대를 부수는 영화다. “우리에겐 이야기가 필요하구나”라는 것이 시나리오를 쓸 때 첫 생각이었다면, “우리는 왜 이야기를 해야만 합니까? 할 이야기가 없는 나는 왜 죽어야 합니까? 그놈의 이야기 좀 그만하려고요”라는 영화 속 ‘로맨스 조’의 말은 맺음말에 가깝다. 다른 사람의 연애 소문을 즐기던 소년은 막상 그 소문의 당사자가 되고 보니 “다 쓸데없다. 그런 이야기가 나한테 왜 중요하냐”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진짜 ‘로맨스 조’는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이야기가 자신을 치유하리라는 믿음,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삶에 편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망상에 가깝다. 이광국 감독은 이야기꾼이라기보다는 듣는 사람이다. 그는 여러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고 이 이야기들이 관객의 눈을 거쳐 어떤 결말을 맺게 될지 기다리고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집중했던 점은 구조다. 여러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는 과정을 구조적으로 만들어봐야겠다는 의도가 컸고, 그러다 보니 인물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거리감이 생긴 것 같다”고 말한다.

<로맨스 조>. BIFF 제공

이광국 감독은 5년 동안 홍상수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며 등을 함께 작업했다. 철없는 남자들, 서사를 자유롭게 주유하는 여자들의 모습에서는 홍상수의 영향이 읽히기도 하지만 비교는 여기까지다. “너도 하나의 우주다.” 영화 속 여러 인물들이 되풀이하는 말처럼 는 갇힌 시간 속에서 비현실적인 이야기의 우주를 꿈꾼다. “홍 감독님한테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영화 만드는 태도였어요. 상품이 아니라 창작을 하는구나 느낄 수 있게 하는 태도를 가장 존경해요. 그동안 몸으로 배운 게 있기 때문에 이 적은 예산에 16회차라는 적은 촬영으로 영화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주위 사람들은 너도 감독님 같은 영화를 만든 거 아니냐고 하는데 별로 중요한 거 같지 않아요.” 의 제작비는 ‘ 신인감독 발굴 프로젝트 2010’에서 지원받은 5천만원이 전부다. 여기에 아시아영화펀드(ACF)의 후반작업 제작지원이 보태졌다. 그는 이 예산으로 스태프들 15명, 배우 15명으로 115분짜리 첫 장편을 만들었다. 그렇게 얻어진 그의 영화에 대한 생각은 ‘로맨스 조’만큼이나 낭만적이다. “결국에는 자기 생긴 대로 창작을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영화감독이 되어서 돈을 버는 사람은 극소수인데 모두들 돈도 벌고 싶고 영화도 만들고 싶다고 하니 더 힘들어지죠. 자기 생긴 대로 영화를 평생 만드는 것,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깨끗이 포기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저는 그렇게 가고 싶어요. 어떻게든 평생 영화를 한편한편 만들어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이 낭만이 성취되는 지점을 향해 그의 영화는 흐른다.

남은주 기자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