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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의 도시 탈출

“떠나니 좋더라”… 반듯하게 짜인 도시 버리고 한갓진 마을에서 다른 창작 길어올리는 문화예술인들의 낯선 일상
등록 2011-06-16 18:47 수정 2020-05-03 04:26
한겨레21 이종찬

한겨레21 이종찬

만화가는 요새 펜보다 호미를 자주 든다. 앞마당 작은 텃밭에서 만화가는 기르는 작물을 설명했다. 배추, 상추, 파, 호박은 기본이다. 캐모마일과 허브, 둥굴레도 있다. 그는 1990년대 초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다. 식물은 도감으로 배웠다. 국화과에 속하는 캐모마일의 작은 꽃잎을 따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냄새를 맡아본 건 지난해 8월이 처음이다. 그전까지 캐모마일은 그에게 ‘냄새’나 ‘색’이 아니라 ‘주문해서 마시는 허브티의 한 종류’였을 뿐이다. 꽃 피기 전 둥굴레의 잎겨드랑이가 뾰족하게 생겼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만화잡지 김대중(37) 공동대표는 서울 양재동에서 작업하던 지난해 8월까지 이런 자연의 진짜 모습을 전혀 몰랐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만화 작업실이 된 시골 폐교</font></font>

“그전에는 식물이나 자연을 묘사할 때 주로 도감을 참조하셨겠어요.” 개구리를 잡으려는 김 대표의 등 뒤에서 물었다. “그렇기도 하고요… 주로 정형화된 (자연) 모습을 그렸죠.” 바지를 걷어올리고 슬리퍼를 신은 채 그는 다시 양계장으로 걸어갔다. 그는 지난해 처음으로 닭 잡는 법을 배웠다.

6월9일 충북 제천시 수산면 대전리의 날씨는 적당히 선선했다. 초가을 날씨 정도의 습도와 온도가 폐교에서 새만화책 작업실로 변한 옛 대전초등학교 건물을 감쌌다. 김 대표는 지난해 8월 서울 양재동에서 이곳으로 터를 옮겼다. 폐교를 임대해 작업실과 출판사 사무실로 개조했다. 아이 키보다 웃자란 운동장 풀을 깎는 데 몇 주일을 바쳤다. 풀을 없애자 색 바랜 책 읽는 어린이 석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 대표 숙소, 새만화책 사무실 및 작업실이 그렇게 태어났다. 교장 사택은 쓸고 닦아 ‘게스트하우스’로 고쳤다. 폐교 임대와 정착에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예마네)의 도움을 받았다. 예마네는 문화예술가들과 지역 마을의 교류를 확대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단체다. 이명박 정부의 ‘표적 해임’ 논란을 불렀던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 대표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예마네의 설립 취지가 어느 정도 구현된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대표는 50가구 120여 명이 사는 마을에서 ‘교사님’으로 불린다. 지난해 농한기에 주민을 상대로 한글·영어·미술 강좌를 시작했다. 마을 소식지 를 펴내 필부들의 사연을 담아냈다. ‘마을만이 희망이다’라는 예마네의 철학이 소식지 발간에 깔려 있다.

김 대표는 작가이자 경영자(새만화책)다. 이란 혁명을 다뤄 주목받은 (마르잔 사트라피), 한국 현대사를 다룬 (김은성) 등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작가주의적 만화 작품을 주로 펴낸다. 애초 서울 탈출은 경영적 선택이었다. “새만화책에 소속된 작가가 20여 명 됩니다. 이분들을 이끌고 경제적 토대를 만드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서울에서는 쉽지 않았죠.” 강남의 깔끔한 작업 환경을 버렸다. 대신 저렴한 비용으로 쾌적한 작업 환경을 얻었다. 초고속 인터넷과 컴퓨터가 있어 출판 사업에도 지장이 없다.

경영자로서의 선택이 ‘작가 김대중’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요새 김 대표는 궁금하다. 토종닭을 직접 기르고 잡은 경험, 단양팔경의 새벽 어스름은 훌륭한 시각적 자극이 됐다. 마을공동체 활동은 정서적 자극이다. 이정수 만화가, 조경숙 새만화책 공동대표, 장양선 실장이 머무는 학교에 수시로 손님들이 찾는다. 마을 주민들이 대표적인 손님이다. 작업을 위해 이곳에 머무는 만화가 사카키바라 스미토 같은 외국의 동료 만화가도 손님으로 방문한다. 이런 시각·정서적 자극은 훗날 묘사와 캐릭터에서 되살아나리라고 김 대표는 기대한다.

주변 환경의 변화는 만화가에게 직접적인 시각적 자극을 준다. ‘새만화책’ 공동대표인 김대중(오른쪽)씨와 조경숙씨가 폐교를 개조한 작업실에서 논의 중이다. 한겨레21 이종찬

주변 환경의 변화는 만화가에게 직접적인 시각적 자극을 준다. ‘새만화책’ 공동대표인 김대중(오른쪽)씨와 조경숙씨가 폐교를 개조한 작업실에서 논의 중이다. 한겨레21 이종찬

<font size="3"><font color="#006699">문장을 바꾼 제주에서의 2년</font></font>

김 대표는 차로 10분 거리인 이웃 덕산면을 종종 찾는다. (사회평론)을 그린 만화가 이은홍씨를 만나기 위해서다. 이씨도 김 대표처럼 2003년 서울을 버렸다. 일러스트레이터인 아내 신혜원씨의 주장에 못 이겨 내려왔다. 그러나 ‘탈도시’는 작품에 오롯이 반영됐다. “주변을 묘사하는 데 더 구체적이 되죠. 예전에 만화를 그릴 땐 아는 풍경을 머릿속에서 상상해서 그리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수를 하죠. 가령 작품의 시간 배경은 가을인데 봄꽃을 그린다든가 하는 식이죠. 도시에 살 땐 (배경을) 무신경하게 그렸어요. 철 따라 피는 꽃이랄지 그런 것에 대한 구분이 없었는데, (내려온 뒤)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하게 됐죠. 제철(식물)에 대한 구분이랄까요.” 서사를 다루는 만화가가 문제적 인물을 발굴하는 데는 다양한 군상이 있는 도시가 낫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씨는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다고 답했다.

이처럼 도시를 떠나는 문화예술인들이 꾸준히 이어진다. ‘탈도시 창작’이 작품에 끼치는 영향은 장르마다 다양한 것으로 분석된다. 소설가 윤대녕씨는 문체에 영향을 받은 경우에 해당한다. 윤씨는 2003년부터 2년간 제주도에서 거주했다. 주소지를 이전해 ‘진짜 제주 사람’으로 살았다. 바다에서 우럭을 낚고 주민들과 소주를 마셨다. 제주도 경험을 토대로 2005년 (문학동네)를 펴냈다. 윤씨의 작품 세계를 저널리즘은 종종 ‘존재의 시원에 대한 탐구’로 요약한다. 이미지와 상징이 많은 서정적 문체로 늘 주목받았다. 윤씨는 과의 통화에서 “제주도 바다의 강인함이 영향을 줬습니다”라고 말했다. “제주 바다의 강인함을 겪으며 문체가 변했습니다. 형용사와 부사를 줄이고 하드보일드한 문체를 지향하게 되더군요. 이런 변화를 철학교수인 한 지인에게 말했더니 그분이 ‘바다의 소금기가 생명체를 강인하게 만든 것’이라고 설명하시더군요.”

묘사문에서 이런 차이가 잘 드러난다. 정서를 표 나게 내세우기보다 신문 기사체에 가까운 담담한 묘사에 기댄다. “그는 벵에돔을 집으로 들고 와 욕조 안에 풀어놓았다. 벵에돔은 그새 힘이 빠졌는지 느리게 물속을 유영하다 구석에 가서 가만히 멈췄다. 그는 욕조 모서리에 걸터앉아 방금 헤어지고 돌아온 연인의 사진을 보듯 오래오래 물고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와 같은 문장이 그렇다. 윤씨는 애월읍의 외도동 바닷바람을 가장 강인한 바람으로 꼽았다.

윤씨는 스스로 이런 변화를 “터프해졌다”고 표현했다. 주제도 “현실의 이야기”나 “뼈대가 굵은 이야기”로 관심이 바뀌었다고 윤씨는 덧붙였다. 문학동네는 이 소설에 대해 “작가에게 상당한 내적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새 옷을 걸치고 낯선 곳으로 여정을 준비하듯, 이 작품은 낯설고 지극히 새로워 윤대녕 문학 인생의 분수령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다양한 창작가 모여 ‘탈일상 통섭’</font></font>
번역가 김석희씨는 제주도 애월읍 바닷가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번역한다. 김석희 제공

번역가 김석희씨는 제주도 애월읍 바닷가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번역한다. 김석희 제공

‘탈도시’가 간접적 영향을 주기도 한다. 작업 환경 변화를 통해서다. 번역가 김석희씨는 과의 통화에서 “생활 자체가 ‘널널’해졌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2009년 4월 제주 애월읍 신암리 해안가에 작업실을 지었다. 작업실에서 눈을 돌리면 제주 바다가 항상 소리쳐 운다. 번역으로 널리 알려진 김씨는 가장 큰 변화로 ‘여유로운 환경’을 꼽았다. 그는 “마당에서 잡초를 뽑고 꽃과 나무에 물을 줍니다. 아파트와 전혀 다른 (생활) 방식이어서 나를 놓아버리는 시간이 많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번역가로서는 고향 제주 바닷가에서의 작업에서 장단점을 함께 느낀다. “작업에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번역은 기본적으로 시간의 산물”로 “번역 경험과 연륜이 쌓여야 생산성도 높아지며 동시에 엉덩이가 무거워야 한다”는 철학을 김씨는 갖고 있다. 제주에 내려온 뒤 하루에 꼭 채웠던 번역 분량을 못 채우는 날이 생겼다. 김씨는 “(탈도시가) 번역 작업에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라며 “서울에서는 ‘8·8·8’ 원칙을 만들어 반드시 8시간은 번역에 할애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생산성이 좀 떨어졌다는 얘기다.

‘창작 레지던스’를 표방하는 부악문원이나 만화가 김태권씨의 작업 실험은 ‘탈도시’보다 ‘탈일상’에 가깝다. 부악문원은 1998년 소설가 이문열씨가 사재를 털어 만들었다. 경기 이천시 마장면 장암리 산자락에 있다. 소설가, 시나리오작가 등 10여 명이 폐쇄된 건물에서 먹고 자며 창작에 몰두한다. 부악문원 창작자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자연이 아니다. 폐쇄된 공간에서 다양한 장르의 창작자들이 교류하는 ‘관계’가 영향을 준다. 소설가인 박석근 사무국장은 “소설가, 시나리오작가, 희곡작가, 영화감독들 사이의 장르 교류”를 장점으로 꼽았다. “희곡은 대사가 중요합니다. 대사로 스토리를 끌고 가지요. 소설가는 희곡작가와 일상적으로 밥을 먹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대사를 서술하는 방식을 참고하게 됩니다. 일종의 통섭이죠”라고 그는 설명했다. 번잡한 도시에서 벗어나는 게 집중력을 높이는 점도 박 사무국장은 언급했다. “폐쇄된 농촌에서의 창작이 인물과 서사를 길어올리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다양한 노력을 합니다. 부악문원의 어떤 작가는 배우 사진을 책상에 걸어놓고 이미지 상상을 하시는 분도 있죠.” 박 사무국장은 덧붙였다.

만화가 김태권씨는 를 그리려고 2009년 여름 서울을 떴다. 스위스 바젤에서 석 달간 작업했다. 동양 이야기를 쓰려고 서양 땅을 찾은 셈이다. 주변 환경 ‘낯설게 하기’에 해당한다. 풍부한 녹지와 박물관은 재충전에 도움을 줬다.

한겨레21 이종찬

한겨레21 이종찬

<font size="3"><font color="#006699">‘낯설게하기’ 기법을 적용하는 작가들</font></font>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일상적 예술을 낯설게 만들어 충격을 줌으로써 독자가 새로운 인식에 다다르게 하는 데 예술의 목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낯설게하기’ 기법이다. 충북 제천, 제주, 경기 이천에서 자신의 삶에 낯설게하기 기법을 적용하는 작가들이 있다. 이들에겐 삶 자체가 예술이다. 다른 창작물은 다른 삶에서 나온다고 이들은 믿는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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