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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적인 것의 슬픔

선정성 앞에서 예상치 못한 감정을 보여주는 두 시집, 함성호의 <키르티무카> 김이듬의 <말할 수 없는 애인>
등록 2011-06-03 16:40 수정 2020-05-03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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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성이란 무엇인가. ‘부채질할 선(煽)’에 ‘감정 정(情)’이다. 어떤 감정을 강렬하게 유도한다는 것. 대체로 그 감정이 성적인 것이거나 폭력적인 것일 때 저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 감정을 자극하는 일은 부도덕한 일이어서 선정적인 것은 곧 나쁜 것이 된다. 그런 수준에서 멈추는 작품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굳이 공들여 비난할 생각도 없다. 예술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시시한 작품들이 차라리 더 나쁜 것일 수도 있으니까. 흥미로운 것은 어떤 ‘선정적인’ 작품이 성과 폭력의 영역으로 진입해서는 좀 다른 감정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는 경우들이다.

“누나를 따먹고 말았어요 골프채로/ 아버지한테 죽도록 맞았지요/ 아버지의 눈이 이해할 수 없는/ 광기로 번득이는 걸 보았어요/ 어머니는 주저앉아 울지도 못했지요/ 누나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몸을 던졌어요/ 열한 살 때 쓰레기통에서 누나의 피를 처음 보았지요/ 골프채로 아버지를 죽였어요/ 실수였어요, 내 인생이 원래 그렇지요/ 어머니, 불쌍한 어머니/ 아무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난 아직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나요?/ 왜 그녀를 사랑하면 안 되는 건가요/ 다른 사람들도 그러나요?”

함성호의 새 시집 (문학과지성사 펴냄)에 수록된 시 ‘과자와 설탕을 실은 장난감 열차’의 전반부다. 내가 누나와 근친상간을 범하자 아버지는 나를 골프채로 두들겨 팬다. 누나가 투신자살하고 나는 아버지를 살해한다. 일단은 선정적이라고 해야 하리라. 그러나 이 시는 끝내 슬프다. 아버지가 누나를 꾸준히 성폭행해왔다는 사실이 시의 후반부에 폭로되면서 ‘나’의 패악이 어쩌면 더 근원적인 폭력의 반작용일 수 있음을 변호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가족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으므로 철저하게 이 비극의 구경꾼이 되고 만 “불쌍한 어머니”의 자리야말로 가장 끔찍하지 않았을까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 편 더 읽자.

“가령 이런 식이다/ 남자 친구의 아버지가 소파를 바로잡은 후/ 내 등에 쏟았던 정액을 닦아내고/ 간지러워하며 내가 팬티를 추켜올리려는 순간/ 초인종을 누르지도 않고 남자 친구가 들어왔던 것이다/ 나의 새어머니가 내게 고분고분해질 즈음/ 딸을 내놔라 소리치며 죽었던 엄마가/ 살아 돌아왔던 식이다/ 이렇게 동시에 진행되는 일들은/ 가령 우산을 접을 것인가 세울 것인가/ 눈이 먼저냐 빗방울이 먼저냐 식의/ 사소한 번민 속으로 나를 데려간다/ 나는 도시의 우울한 군중 속으로 간다/ 헤드폰을 꺼내 귀마개 용도로 끼운 채.”

김이듬의 새 시집 (문학과지성사 펴냄)에 수록된 시 ‘동시에 모두가 왔다’를 중간부터 옮겨 적었다. 이 시인의 시에는 이처럼 일반적인 의미에서 ‘선정적인’ 장면이 가끔 등장하지만 그런 장면은 읽는 이를 끌어당기지 않고 오히려 뒤로 물러나게 한다. 불행을 견디는 데 익숙해진, 그래서 세상을 원망하는 단계조차 뛰어넘은, 그러므로 호기심과 동정심까지도 무덤덤하게 튕겨내는, 그런 서늘한 무표정 때문이다. 확실히 끔찍하고 난감한 상황들을 겪었는데도 그저 “사소한 번민” 정도를 느끼며 화자가 헤드폰을 귀에 꽂고 군중 속으로 섞여 들어갈 때, 이 시는 바로 그런 표정을 짓는다. 이 표정은 슬프다.

좋은 시는 어떤 장면을 보여주되 거기서 흔히 예상되는 것과는 다른 감정을 창조해낸다. 그리고 그 감정이 발생하는 순간은 그 시가 어떤 진실에 도달하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두 편의 ‘선정적인’ 시에서 우리는, 삶이라는 무대에서 자신이 한 번도 원해본 적 없는 배역을 떠맡았음을 문득 깨닫는 한 인간의 슬픔을 느낀다. 언뜻 선정적이되 결국 비극적이다. 다른 예술작품이 그러하듯 시 또한, 성과 폭력을 통해서만 겨우 드러나는 인간의 내면과 삶의 진실이 있다면, 기꺼이 섹스하고 폭행할 것이다. 어떤 선정성은 가면을 쓴 진정성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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