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공중파 가요 방송을 보았다. 변함없이 아이돌 그룹 일색이었다. 가요계 동향을 잘 모르는데도 금방 사라질 그룹과 오래갈 그룹은 한눈에 구별이 갔다. 필사적으로 춤추는 소년·소녀들을 보자니 궁금해졌다. 저들 중 몇이나 살아남을지. 문득 옛 추억이 떠올라 청소년기에 사랑하던 아이돌들을 헤아려보았다. 누구는 사업을 하고, 누구는 연기자가 됐고, 누구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왕년의 추억을 팔고, 누구는 텔레비전에서 자취를 감췄다. 텔레비전에 안 나오는 ‘오빠’들은 지금 어떤 어른이 돼 있을까? 나는 ‘아는 오빠’인 이시우(26)씨에게 인터뷰를 하자고 졸랐다. 그는, 아이돌이었으니까.
이시우씨를 ‘오빠’라 지칭하겠다(전직 아이돌에 대한 일종의 예우라고 생각해도 좋다). 처음 알게 된 날, 내가 “뭐하시는 분이냐”고 묻자 그는 아무 수식어 없이 달랑 이렇게 대꾸했다. “음악 해요.”
그렇다. 이 오빠, 음악 하는 사람 맞다. 직업명으로 정의 내리자면 가수·래퍼·작사가·작곡가랄 수 있겠다. 줄여서, 뮤지션. 오빠에게는 3개의 이름이 있다. 이름 얘기를 풀어놓으면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인다.
<font color="#991900">① 본명 ‘이상훈’</font>2002년에 남성 5인조 아이돌 그룹 ‘QOQ’로 데뷔할 때 썼던 호적상 이름. 지금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이 이름 말고 주로 아래의 ②번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font color="#638F03">*그룹 QOQ는 ‘2002년’에 화려하게 나와 ‘2002년’에 조용히 해체했음. 가요계에서 본명 이상훈으로 활동한 기간은 만 1년이 안 된다는 소리. </font><font color="#991900">② 스스로 지은 이름 ‘이시우’</font>
그룹 탈퇴 뒤 홀로서기를 시작할 때 지은 예명. 한자로 ‘날개 시’ ‘돋을 우’. 예명이지만 현재 본명이나 다름없다. 이 이름을 전해들은 내 측근 K는 “어쩐지 귀여니 소설에 나오는 학교짱 이름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으나, 솔직히 ①번보다 훨씬 뮤지션 이름다운 건 맞다.
<font color="#638F03">*본명 삼으려 했으나 개명 신청 서류를 접수해놓고도 막상 법원 가는 게 귀찮아 그냥 살고 있다 함.</font>
<font color="#991900">③ 현 소속사 사장님이 지어준 이름 ‘매직플로우’</font>
영어 표기는 ‘Mazik FloW’라고 한다. 지난해 상반기부터 이 이름으로 솔로 활동을 하고 있다. 랩과 노래를 구분짓지 않고 ‘마법처럼 흐르는 듯한’ 음악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지었다는데… 예명이야 일단 짓고 나서 뜻을 갖다 붙이는 경우도 많으니, 진실은 저 너머에.
<font color="#638F03">*텔레비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게 아니라서 이 이름을 당신이 모른다 해도 딱히 이상할 건 없음.</font>아직 하나 더 남았다. 시기상 ②번과 ③번 사이에 있었던 이름이다. 첫 솔로 데뷔할 때 썼던 예명 ‘쿨라피카’. 지금은 쓰지 않으니 번외 ④번쯤으로 치자. 당시 공연하러 내한한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오프닝 무대를 맡길 한국 신인으로 쿨라피카를 직접 지목했다는 전설이 있다. 아길레라가 맑은 정신으로 그랬는지, 아님 심신미약 상태에서 그랬는지 이제 와 알 길은 없다. 아무튼 전도유망했다. 그러나 쿨라피카로서의 활동은 금방 끝났다(그래서 번외 ④번이라는 거다). 거액의 활동비를 매니저가 들고 도망가서. 이른바 ‘먹튀’였다.
아마 대중음악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더라면 본명 ‘이상훈’으로만 살았을 텐데 말이다. 그의 인생은 대중음악에 뜻을 품은 중학교 3학년 시절을 기점으로 나뉜다. 예수 탄생이 역사를 BC(기원전)와 AD(서기)로 양분한 것처럼.
데뷔 뒤 찾아온 교통사고
어릴 적 그는 별별 분야를 섭렵했다. 굴착기로 한 지점을 재빨리 파고, 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냉큼 딴 우물을 파러 떠나는 식이었다. 소질 드러내며 잘하던 걸 휙 관둘 때,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음엔 뭘 할까 매번 설레고 즐거웠다. 그 와중에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은 점점 커졌다. 비록 피아노는 건성으로 쳤지만, 초등학생 때는 친구들과 ‘서태지와 아이들’의 안무를 연습하고, 중학생 때는 누구한테 배운 적도 없는데 혼자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음악을 하던 외삼촌의 영향 또한 적지 않다. 오빠의 얼굴은 외삼촌을 빼닮았다. 외삼촌은 꼬마였던 그의 앞에서 늘 기타를 치거나 음악(가요·팝·록)을 크게 틀어줬다. 오빠는 음악 하는 것까지 외삼촌을 닮은 게 신기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외삼촌은 오래전 간암으로 겨우 마흔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 나는 “간암만은 닮지 마”라고 당부했다.
외삼촌의 기타 소리, 피아노학원에 울려퍼지던 클래식들, 서태지와 H.O.T를 비롯한 여러 가요를 들으며 자라난 이 소년은 중3 무렵 드디어 자각했다. 자신이 대중음악을 업으로 삼고 싶어한다는 걸. 동기는 힙합 그룹 ‘원타임’(1tyme)의 음반 속지에서 발견한 연습생 모집 광고였다. YG가 원타임과 지누션으로 인지도를 쌓았으나 지금 같은 굴지의 대형 기획사가 되기 전이었다. 슬픈 사랑 노래 몇 곡을 불러 녹음한 데모 CD를 보냈다. 그는 곧 합격 통지를 받고 YG 연습생이 됐다. 방과 후에 회사로 가서 노래와 랩 연습을 하고, 매주 한 번씩 다른 연습생들과 양현석 사장 앞에서 한 주간 연습한 것을 선보이고 평가받는 일상이 한동안 이어졌다. 연습생들 대부분이 법적으로 자유의 몸이었다. 데뷔가 확정나면 그제야 비로소 정식 계약을 맺고 ‘회사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그룹 ‘빅뱅’의 데뷔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에도 연습생들의 이런 사정이 자세히 나온다). 오빠는 계약서를 쓰지 않은 연습생이었다. 그러다 지인한테서 그룹 룰라의 리더이자 프로듀서인 이상민씨를 소개받았다. 오빠는 인터뷰 내내 그를 ‘상민이 형’이라 칭했다. 그 ‘상민이 형’이 기획한 5인조 그룹에 들어가기로 하고 YG를 나왔다. 제2의 H.O.T 같은 그룹을 하고 싶어서였다.
<font color="#006699">나: </font>나올 때 아깝지 않았어? 아니, 그냥 회사도 아니고 YG인데?
<font color="#C21A8D">오빠: </font>원래 난 내 결정에 절대 후회 안 해(…라고 하지만 말과 표정이 미묘하게 어긋난다).
그룹을 준비하느라 집도 나왔다. 가출이 아니고 독립. 처음으로 얻은 집은 서울 청담동에 있었다. 말도 안 되게 낡고, 말도 안 되게 비좁아서, 말도 안 되게 싼 곳이었다. 청담동에 그런 집이 있다는 걸 전혀 상상 못할 만큼. 거기서 혼자 살며 연습을 다니다 만 열여덟에 QOQ의 막내로 데뷔했다. 회사는 그룹 홍보에 돈을 퍼부었다. 데뷔곡 는 반응이 좋았다. 그러다 갑자기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룹 멤버가 모두 중상을 입었다. 자리를 잡아가던 참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거기다 멤버들끼리의 불화가 심각해졌고, 회사 경영진은 수익금 정산을 도통 안 해줬다. 오빠는 지진을 예감하고 도망치는 야생동물처럼 그룹을 가장 먼저 탈퇴했다. “내가 받아야 할 돈 안 줘도 되니까 붙잡지만 마라”고 하며. 그러자 회사는 오빠를 순순히 놔주었다. 수익금을 주지도, 위약금을 청구하지도, 소송을 걸어오지도 않고.
공동 작사한 노래 뺏기기도그보다 어이없는 일도 종류별로 겪어왔다. 얼마 전에는 오래 알고 지낸 작곡가 형 이아무개씨와 공동 작사한 노래를 고스란히 뺏겼다. 음원이 공개된 날 확인해보니 이아무개씨의 이름만 올라가 있었다. 가해자 이아무개씨는 작정하고 잠수를 탔다. 오빠를 훈계하고 자기 처지를 합리화하는 긴 문자를 한 통 보내왔을 뿐이다. 오빠는 법적 대응을 하려고 가처분 신청 절차를 알아봤다. 그렇지만 내버려두기로 했다. 인터뷰를 하다 만난 또 다른 작곡가 형님은 오빠에게 “그래, 네가 참아라. 어쩌겠냐. 그냥 풀어버려”라며 소주를 콸콸 따라주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이런 일이 옛날만큼 흔치는 않은데 아예 없는 일도 아니죠”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데 오빠는 억울한 일을 전혀 안 당해본 사람같이 굴었다. 자기 천성이 그렇다고. 우리가 있던 술집은 오빠의 친구가 하는 곳이었다. 술집 사장님도 아이돌 그룹 출신인데, 내 옆에 잠깐 앉아 이런 속내를 털어놓고는 수줍어하며 도망갔다.
“상훈이는 노래에 미친 놈이에요. 10년 넘게 알고 지냈는데… 나는 음악을 일찌감치 관뒀거든요. 하고 싶은 건 다 이뤘으니까. 중3 때 첫 앨범을 냈어요. 그러고 한동안 시간을 흘려보내다, 아예 다른 걸 하자, 그러고 이 가게를 시작한 거예요. 근데 얘는 음악을 계속하더라고요. 당장 잘되든 안 되든 쭉. (중략) 내가 진짜 오래된 친구이기 때문에, 얘가 진짜 재능이 없으면 그냥 “때려치워라. 일이나 해라” 그랬을 텐데, 얘는 정말 재능이 있어서 관두라는 말 절대 못하겠어요. 앞으로 가능성이 너무나 커 보여서.”
‘노래에 미친 놈’이라는 친구의 평가답게, 오빠는 대화 중 툭하면 즉흥으로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그때마다 어색해하던 나는 마침내 적응해 덩달아 어깨를 들썩였다. 오빠는 카운터로 가더니 며칠 전에 마스터링을 끝냈다는 자신의 미발표 신곡을 크게 틀었다. 디지털 싱글로 나올 거라고 했다. 가요계의 상품 형태가 ‘CD’(정규앨범)에서 ‘음원’(MP3 파일) 중심으로 바뀐 지 오래니 그도 거기에 맞추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음원은 간편하다. 듣는 사람은 구하기 쉽고, 파는 사람은 유통이 쉽다. 하지만 오빠는 “간편한 만큼 사람들이 노래를 소모품처럼 대해서 안타깝다”고 했다. 음악을 만들수록 그런 회의와 고민 또한 깊어진다.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하고 싶은 음악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음악 해서 떼돈 벌고 싶다’ ‘많이 팔리는 음악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
<font color="#006699">나:</font> 솔직히 진짜로 없어? 전~혀?
<font color="#C21A8D">오빠:</font> 떼돈 들어오면 좋기야 좋겠지. 그런데 돈 벌려고 작정하고 어떤 노래를 만들진 않지. 난 남들처럼 외제차 타고 강남 아파트 사고 싶다, 그런 마음은 이상하게 없어.
<font color="#006699">나:</font> 그럼 돈 많이 생기면 뭐하고 싶은데.
<font color="#C21A8D">오빠:</font> 집에 바를 하나 근사하게 만들 거야.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이랑 음악인들이랑 같이 좋은 술 마시며 놀게.
<font color="#006699">나: </font>저번에는 지하 벙커 만들어서 종말에 대비하고 싶다는 소리 했잖아.
<font color="#C21A8D">오빠:</font> 어, 맞아, 그것도 해야지.
그저 지금이 좋은 삶잠시 뒤 그는 그런 게 없는 지금도 좋다고 했다. 현실에 ‘안주’하는 게 아니라 ‘만족’한다고, 거듭 강조하면서. 그래, 지하 벙커랑 바가 없으면 어떠냐. 자기가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걸 하며 사는데. 손님이 한 차례 빠진 술집 안에 아까 그 노래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나도 같이 흥얼거렸다, 그 멜로디를.
글 한혜경 제1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사진 이종찬 선임기자 r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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