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항상 내게 이르되, ‘둘이 머리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자네 먼저 가시는가?/ 나하고 자식하며 누구에게 기대어 어찌하여 살라 하고/ 다 던지고 자네 먼저 가시는가?/ 자네가 날 향해 마음을 어떻게 가졌으며/ 나는 자네 향해 마음을 어떻게 가졌던가?/ 매양 자네에게 내 이르되, 함께 누워서,/ “이보소, 남도 우리같이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 남도 우리 같은가?”/ 하고 자네에게 일렀는데, 어찌 그런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 자네 여의고 아무래도 내 살 힘이 없으니/ 쉬 자네한테 가고자 하니 날 데려가소. 자네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방법이 없으니, (중략)/ 내 꿈에 이 편지 보신 말 자세히 듣고자 이리 써서 넣네./ 자세히 보시고 내게 이르소.”
‘자네’에서 읽은 조선 중기 여성의 위치
먼저 떠난 이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한 이 편지의 주인공은 남자일까, 여자일까? 편지는 조선 선조 19년(1586년) 이응태의 부인 ‘원이 엄마’가 쓴 것이다. 원이 엄마는 누구인가? 그에 대한 기록은 허술하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남편 이응태 또한 알려진 바가 미미하다. 그의 집안 고성 이씨 족보를 조사해봐도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아내와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 정도밖에 확인할 수 없다. 다만 1998년 경북 안동에서 발굴된 고성 이씨 일가의 무덤 몇 기 사이에서 412년 만에 빛을 본 편지 가운데 ‘원이’라는 아이가 등장해 학계나 일반에서 ‘원이 엄마’라 칭할 뿐이다.
(너머북스 펴냄)를 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 정해은 박사는 일찍 남편과 헤어진 원이 엄마의 애절한 사연보다는 그가 쓴 어투에 주목한다. 원이 엄마는 남편을 ‘자네’(원문에는 자내)라 부른다. 문장의 끝도 ‘~소’ ‘~네’다. ‘자네’는 듣는 이가 친구나 아랫사람인 경우, 그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하소’ 역시 상대방을 보통으로 높이는 종결형이다.
16~17세기의 편지에서 ‘자네~ 하소’의 문장투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보통 남편이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주 등장한다. 반면 아내가 남편에게 ‘자네’라 쓴 편지는 현재까지 원이 엄마의 것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러니 당시 여인들의 일반적 어투라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정 연구원은 원이 엄마의 편지에서 미루어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는 부부 사이가 대등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당시에는 조선 사회의 가부장제가 확고히 자리를 잡지 않았으므로 부부간의 호칭에 격의가 없었으며 여성의 영향력 또한 컸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정 연구원은 실례로 조선에 17세기 중반까지 남아 있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풍습을 든다. 남귀여가혼은 고려 이래 내려오던 혼인 풍속으로, 신부 집에서 결혼식을 치른 뒤 부부가 일정 기간 신부 집에서 사는 전통이다. 결혼한 딸이 바로 출가하지 않으니, 혼인한 딸에게도 아들과 똑같이 재산을 나눠주고 가정에서 여성의 권위를 인정했다.
원이 엄마의 애끊는 이별가는 현대에도 공감대를 형성해 창작 오페라로 제작되는가 하면 영화 의 모티브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는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며 원이 엄마의 편지를 왜곡해 번역한다. 이런 식이다.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가 없어요./ 빨리 당신에게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주세요.” 원문의 톤이 다정한 한편 튼튼했다면, 현대의 번역은 의존적이고 나약하다. 정숙과 순종만 강조해왔던 가부장적 시선이 편지가 땅에 묻힌 지 400여 년이 지나 오히려 되살아난 셈이다.
정 연구원은 원이 엄마 외에도 24명의 여성을 조명한다. 황진이, 허난설헌, 혜경궁 홍씨 등 이름이 익숙한 이가 있는가 하면 실학자 이빙허각, 글짓기에 능했던 강정일당, 9년 동안 이혼소송에 시달린 신태영 등 비교적 낯선 이도 있다.
이중 이빙허각(1759~1824)은 등의 저서를 부지런히 펴낸 조선의 실학자다. 특히 총 다섯 편으로 구성된 는 술·음식 만들기, 옷 만들기, 길쌈하기, 수놓기, 누에치기, 밭일, 꽃심기, 가축기르기, 태교·육아법, 응급처치법, 귀신 쫓는 법, 재난방지법 등 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총망라해놓은 실용서다. 참고 문헌도 방대하다. 한국과 중국의 서적 80여 종을 인용하고 출처를 밝혀 서술했다. 학계에서는 를 두고 여성 생활 경제서 정도로 이해하며 중요하게 다루지 않지만, 정 연구원의 생각은 다르다. 17세기 당시 실학은 공리공담의 성리학을 비판하며 등장한 새로운 학문이었다. 이빙허각은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를 여성의 눈으로 관찰하고 신학문을 진보적으로 받아들였다.
600년 조선 역사에서 25명을 꼽아 이들의 역사를 한 책에 담으니 한 인물에 할당되는 지면이 때로 부족한 감도 든다. 호기심 많은 독자는 서술이 더 촘촘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가질 듯하다. 그러나 가부장 사회에서 소리 죽여 지내야만 했던 여성을 현재에 모아 주목했다는 점에서 연구는 의미가 깊다. 금기와 제약에 가로막힌 존재들이었던 여인들의 역사는 기록마저 불분명하다. 특히 무명 여성의 삶을 현재로 불러내기 위해서는, 지은이는 야사의 기록집, 타인과 주고받은 편지 등에서나 겨우 그들 역사의 흐린 흔적을 찾아내야 했을 것이다. 설령 기록이 세세하다 하더라도 시대의 ‘아웃사이더’였던 여성을 쓴 당시의 붓끝은 곧고 공정한 방향으로만 향했을 리 만무하다. 지은이는 각종 기록의 이면에 숨은 여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고, 이들의 삶을 대면해야 했다. 단지 25명이지만 이들은 조선 여인의 많은 생을 대변하고 있을 것이다. 25개의 이름이 대신 전하는 조선 시대 여성들의 ‘만인보’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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