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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6ℓ의 와인을 마시며 글을 쓰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와인
등록 2010-12-30 15:37 수정 2020-05-03 04:26
영화 <연인>

영화 <연인>

소설가 클레멘트 프로이트는 “술·담배·연애를 포기하기로 결심한다면, 오래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단지 오래 산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보다 앞선 세대의 소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1914~96)는 ‘제대로’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끊임없이 마시고 피우고 사랑하며 살았으니까.

뒤라스는 12살 때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글을 쓰는 것 외에는 단 한 번도 다른 직업을 생각해보지 못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때때로 글을 영화화하며, 작가와 감독으로서 생을 보냈다. 사진으로 남은 그의 모습을 보노라면 뭔가를 끼적거리고 있거나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거나 장뤼크 고다르 감독과 담배를 나눠 피우고 있거나 하는 식이다.

사랑으로 말하자면 67살의 나이에 삼십대의 연인 얀 앙드리아와 사랑에 빠져 인생의 마지막 16년을 함께했다. 그가 얀과 함께 나눈 시간은 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술은? 소설 에서 뒤라스는 알코올중독자 남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못하다 알지 못할 충동에 이끌려 난생처음 적포도주를 마시기 시작한 여자 안 데바레스드와 그녀가 술집에서 만난 남자 쇼뱅의 사랑과 그 사랑에 의한 비극과 파탄을 그린 소설에는 내내 알코올이 출렁거린다.

주인공이 술에 취하지 않는다면 작가 스스로가 술독에 빠지기도 한다. 사랑을 모르던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육체적 사랑에 빠지고 점차 진정한 사랑에 접근한다. 그러나 사랑이 아니었던 여자는 그를 쉬이 떠난다. 사랑을 몰랐던 남자가 사랑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절망을 그린 은 뒤라스가 내내 술을 마시며 쓴 글이다.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뒤라스는 하루에 와인을 6ℓ씩 마시며 소설을 썼다고 했다.

사실 뒤라스는 우리에게 영화 의 원작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92년 장자크 아노 감독이 영화화한 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베트남에서 가난한 프랑스 소녀가 중국인 사업가와 광기 어린 사랑에 빠지는 내용을 담았다. 반가르마를 탄 머리를 땋아내리고 아이 같은 눈빛과 어른 같은 입술을 가진 제인 마치, 사이공의 ‘차도남’ 같았던 량자후이(양가휘)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한 번도 사랑을 해보지 못한 채 사랑에 빠진 여자와 한 번도 제대로 사랑을 해보지 못한 채 누군가를 그리는 남자의 사랑은 실로 지독하다. 중국인 남자와의 연애를 반대하던 여자의 집은 그 남자가 부자라는 말에 쉬이 허락하고 남자의 집안은 둘의 사랑을 격렬히 반대하며 재산 상속 문제로 남자를 압박한다. 둘의 사랑은 결국 ‘오래오래 행복’하지 않았다. 여자는 배를 타고 그의 곁을 떠나고 남자는 떠나는 여자를 배웅하지 않는다. 대신 멀리 배가 보이는 지점에 꼼짝 않고 차를 대놓고 몰래 슬픔을 삼킨다. 나는 쓸쓸한 그의 얼굴을 보고 그만 엉엉 울어버렸다.

그래서 제안한다. 연말 별다른 약속이 없는 당신이라면 마르그리트 뒤라스처럼 6ℓ의 와인, 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좋아하는 혹은 누군가로부터 추천받은 와인을 마련해놓고(신문과 잡지에 요즘 연일 연말 파티를 위한 와인을 소개하니까) 을 보는 거다. 그 끔찍한 사랑을 안주 삼아 한 해를 그렇게 외롭고 지독하게, 그러나 와인의 달고 쌉쌀한 향내를 찰랑이며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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